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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Jun 30. 2022

 기억소환

아버지와 미숫가루


  8월 중순 매미 소리가 짱짱하다. 저녁 무렵 귀뚜라미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낮에는 여름햇빛에 눌린 화초와 꽃들이 풀죽은 모습이다. 선풍기 바람을 밤새 쐬어서 그런지 아침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몸도 무겁고 입맛도 없다. 문득 시원한 미숫가루 음료가 마시고 싶었다. 작년부터 냉동실에 잠자던 미숫가루를 깨워 국자로 푹푹 퍼서 양푼에 담았다. 설탕은 봉지째 들고 대충 가늠하여 털어넣었다. 휘휘 거품기로 얼음 덩어리를 저었다.미적지근했던 양푼의 온도가 점점 서늘해져갔다. 양푼째 마실까 하다가 품위를 위해 사발로 들이켰다.미숫가루를 마시다보니 문득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아버지는 지금도 날 지켜보실까. 내가 식고를 드릴 때마다 나와 함께 음식을 응감하실까. 아니면 다시 어떤 누군가로 태어나셨을가. 

  생전의 아버지는 키가 186에 얼굴은 미남형이셨고, 체격은 보기 좋게 마른 편이셨다. 아버지의 성격은 평소에 별로 말이 없으셨다가 술만 드시면 그동안 축적된 말들을 나의 귀에 사정 없이 투척하셨다.나는 네, 네, 그렇군요. 리액션에 열중해야만 했다. 그때의 아버지는 주로 공자왈 맹자왈 하셨고, 아침이면 항상 거의 매일 불경 테이프를 틀어 놓으셨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가 절에 가시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절에 가지 않아도 열렬한 불교 신자가 될 수 있고 공자의 사당에 절을 하지 않아도 공자의 법대로만 고집하던 아버지는 인문학 박사같은 어투로 말씀을 유포했다.  

  나는 어릴 때 적어도 아버지를 가난한 도인이라고 생각했다.후일 형제들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눌때 나만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다. 아주 잠깐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는 엄마의 말을 믿을 수 있게 된 것도 나름 그런 이유였다.탄광읍에서 광부로 지내시기에는 그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엄마도 인정했다. 젊은 날 아버지가 쓰셨던 일기장 한 권을 본 적이 있는데 정작 아버지는 그 일기장이 존재하는지도조차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아버지의 일기장을 몰래 돌려봤기 때문이다. 일기장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손수 만든 시화집이라고 해야할까. 겉장도 손수 만든 것이 분명했다. 어릴 때라 그저 아버지가 그린 그림들이 정교하게 잘 그려져 있어 아버지가 그린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아버지의 글씨체였고 아버지가 그린 성모마리아와 백합은 엄마를 염모하여 그린 것이라고 들었다.아버지와 엄마는 그 일기장이 자식들 손에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읽혀지는 것을 방치했다. 아버지의 일기장 그림 하나가 칼로 도려져서 오빠의 일기장에서 발견되었을 때 아버지의 일기장을 흉내내는 오빠를 보면서 나 역시 아버지와 같은 일기장을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노트 하나에 손수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 놓은 자신만의 무술수련책을 만든 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학력은 고졸이었는데 한문실력이 좋아서 잠시 면동네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이라면 가당치도 않겠지만 그때 당시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더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왔더라면 더 잘 풀렸을까?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할머니가 아버지를 밀어주지 못해 아버지가 광부밖에 못되었다고 엄마는 푸념했다.지금도 여자나 남자나 일찍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자기공부에 전념하기는 힘들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는 더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시골 면동네에서 농사가 적성에 안맞아 서울로 상경한 것은 좀 더 잘 살아 보려고 하신 의도일 텐데 아버지는 엄마를 만나 오빠가 태어나 가족을 이루자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서울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의 면동네 보다 쬐금 크다는 도계읍에 자신만의 둥지를 만들었다.                                                                                  도계읍은 그야말로 광산이 없었다면 그냥 개천이 흐르는 작은 동네에 불과했다. 최근 도계를 가보니 광산이 거의 폐광이 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다. 상점은 거의 활성을 잃었고 다리 밑을 흐르는 개천만이 더 이상 검은 물이 아닌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잘 정리된 개천과 잘 개선된 재래시장 그리고 가끔씩 얼토당토하게 멋지게 지어진 9층 모텔은 낮은 판자집이나 기와집, 단층 가계들이 줄비한것과 대비되었다. 시내의 주도로는 일차선이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은 모호하여 차가 오면 상가로 바짝 붙어서 걸어야 한다. 

 넓은 개천 옆으로 높은 협곡이 이어져 있는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했었다.지금은 협곡이 시멘트벽으로 정비되어 그 많던 낡은 집들이 거의 사라졌다.예전에는 정말 미치도록 떠나고 싶었던 읍이었다. 한 밤중 기차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바라보고 했던 생각이 난다. 개찰구 쇠 난간에 기대어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이나 기차가 떠나는 모습,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떠날 거라는 생각을 꾹꾹 다졌다. 석탄을 실은 기차와 산 하나 높이의 검은 석탄더미 그곳은 초록나무로 덮혀있어 아무도 검은 석탄더미인지 모를 것이다.도계역은 깔끔하게 리모델링 되어 있고 작은 광산 읍동네의 허술한 역이 아니었다. 대기실은 에어컨은 기본이고 책장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특히 무섭고 지저분했던 화장실은 온데 간데 없었다. 검정 석탄이 묻은 얼굴을 세수한 모습이랄까. 

 아버지와 함께 벌초를 하러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산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산을 오르고 어느 묘지 앞에서 아버지가 건네 준 소주 한 잔에 취해서 산을 구르듯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고2였었다.-음복이다.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한다. 아버지가 따르는 한 잔의 투명한 소주를 받아마셨다. 그때의 소주 한 잔은 나에게 신선했다. 아버지가 오빠 다음으로 나를 인정해준 것 같은 즉위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는 딸이지만 아들과 같다는 뭐 그런 느낌이었다. 날 믿어 주시는 것에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술이 들어가서 기고만장해졌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날 믿어줘서 기고만장해졌는지 아버지와 함께 벌초를 와서 기고만장해졌는지 나는 그날 몹시 어른인 채 했다. 아버지는 나의 횡설수설을 들어주시고 몇 번씩 산을 내려오면서 구를 뻔 한 것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느끼셨는지 산 아래 어느 동네의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라고 주셨다. 나는 희안하게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술이 깼다.

-아버지 너무 신기해요. 정신이 나요. 술이 깼어요.

-술이 술을 깬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기차역을 향해 시골길을 걷고 걸었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때 나는 검은 콩나물 시루같은 반에서 61번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까지도 똑 같은 그 콩나물들이 한 시루에서 성장했다. 나의 아버지도 광부였고, 친구의 아버지도 광부였고, 아랫집 윗집 아버지도 광부였다. 가끔 장사하는 아버지를 둔 애들도 있었다. 아버지의 직업이 광부인 사람 손들어요 학교에서 가정조사라도 할때면 거의 90%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나는 광부의 딸로 자란 것이 전혀 이상하지도 않았고 열등감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우물안 개구리라고 혀를 찼던 것은 선생님들이었다.우린 그러던 말던 우리식대로 그런대로 잘 먹었고, 적어도 우물안 개구리도  휴가철이면 죽기 살기로 남가는 휴가를 가야했기에 피서철만 되면 기차역은 졸지에 육이오 세트장이라도 되는 양 휴가철피난민으로 북적였다. 아버지는 기차 화장실 창문으로 동생과 나를 강제로 밀어 넣어 겨우 옥계해수욕장에 도착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동생 둘은 놀라 울어댔고 나는 황망하게 놀란 눈으로 엄마를 찾았다. 기차 화장실 창밖의 엄마는 땀으로 뒤범벅된 얼굴로 걱정하지 말라며 엄마도 곧 기차를 탄다고 소리쳤다.아침부터 머리 단장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멋지게 차려입었던 엄마는 몹시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이건 뭐 휴가인지 전쟁인지 모르겠다고 엄마가 중얼거리며 화장실문을 열고 들어왔던 생각이 난다. 엄마는 기차를 탔다는 것이 천만다행인지 우리를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기차앞머리에 난간에 남자들이 매달리듯 많이 탔던 생각이 난다. 그런 광경은 육이오 자료화면 사진과 오버랩되었다.매년 휴가철에 그랬던 거 같다. 그러다 그런 모습도 점차 사라졌지만 나의 어렸을 적 사진에 찍힌 가족들과 친인척 동네 사람들을 보면 어느 누구 하나도 빠짐없이 여자들은 비키니 수영복을 착용했다. 그 당시에도 멋지게 휴가를 보냈다는 게 나는 지금 신기하게 생각된다. 여름 해수욕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수영복차림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피부가 눈부시게 하앻다. 약골로 보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피부가 타면 남들은 까맣게 변하는데 아버지는 끝없이 붉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애졌다. 엄마는 아버지가 빈혈기가 있어 그렇다면서 가끔씩 문어를 삶아 바치곤 했다.

  한 밤중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할 때면 방 바닥 아래에서 쿵쿵 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올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소리가 지하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는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를 거다.아버지는 매일 지하로 내려 갈 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 간다. 그러니 너희들은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처럼 살지 말고...그때는 왜 그 말씀이 심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모든 아버지가 광부일 거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아버지의 고통쯤은 모두의 고통이고 일상적이라 둔감해졌던 것일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냥 답답했을 뿐이었다.돈을 버는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왜 이렇게 좁은 동네로 와서 문화생활도 못누리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불평했던 거 같다. 그럴때면 아버지는 자신이 가난하고 무능해서 선택할 수 밖에 없던 직업이고, 자식들 교육 때문에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자괴적으로 말씀했다. 옆에 그 말을 듣던 엄마는 돈이 웬수다라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성실하게 탄광회사를 다녔다. 매달 엄마는 아버지의 누런 월급봉투를 점령했다. 엄마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진지하게 지폐를 넘겼다. 그리고 점차 엄마의 미소는 흐려졌고 급기야 액수가 비어있는 것을 추궁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버지는 읍내 막걸리집에서 거나하게 걸친 후였다.

아버지가 월급날인데도 집에 일찍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보나마나 술집에 있을 거라면서 나에게 아버지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술집 창문가에 빨간 페인트 글자로 대포집이라고 쓰여있었다. 아버지는 혼자 앉아서 술을 드시고 있었다.

 우리 딸 왔구나. 짬뽕 국물에 막걸리 한 잔 했다.니 엄마가 호랑이 되기 전에 가자. 가자 가.

 그리고 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버지는 잠깐 휘청했지만 이내 나를 밀쳐내고 흐척흐척 걸음을 옮겼다. 나는 동네 어른들 모임에서 가끔씩 막걸리 심부름을 했는데 그때 몰래 주전자 뚜껑으로 막걸리를 마셔봤기에 아딸딸하게 취하신 아버지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회사를 다니셨기에 엄마는 다른 건 칭찬 안해도 아버지의 그 점을 높이 사셨다. 아버지의 작업복을 집에서 빠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작업복은 석탄가루로 범벅이었다. 끝없이 검은 물이 나왔다. 아버지의 누런 알루미늄 사각도시락은 언제나 석탄가루가 묻어있었다. 가끔씩 아버지의 가슴팍 주머니에서는 고무끈으로 짱짱하게 묶인 삼양라면 봉지가 나왔다.고무끈을 풀고 라면봉지를 열면 설탕이 섞인 미숫가루가 나왔다.

-엄마, 이거 뭐에요?-

-미숫가루지 뭐긴 뭐니.-

-엄마, 아버지가 이거 드시고 어떻게 버텨요. 난 도시락 싸가도 배고픈데.

-탄광에서 일하면 땀을 하도 흘려서 입맛이 없어 밥생각이 없다고 그러네. 에구 사는게 뭔지... 도시락에 물 부어서 그냥 김치 하나 넣고 훌훌 입에 털어 넣는다고 해서 생각다 못해 미숫가루라도 타서 드시라고 싸주는 거란다. 탄광 안에서 일하다보면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하는 가보더라.에구... 자식이 뭔지... 그러니까 아버지 고생하는 거 생각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 해야 하는 거야 알았지?-

 나는 갑자기 숙연해져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남긴 미숫가루를 양푼그릇에 타서 동생들이랑 나눠 마셨다.

-달고 맛있다. 언니, 이거 어디서 났어?-

-아버지꺼야. 아버지가 입맛 없어서 엄마가 싸주시는 거래. 아버지 미숫가루니까 찬장에 있는 거는 건들지 말아야 해. 엄마한테 혼난다. 아버지한테 효도해야해. 너희들 말 잘들어. 알았지?-

나는 엄마 품새로 그렇게 동생들에게 엄숙하게 말했다.모든 게 귀했던 당시였다. 미술 시간에는 보리밥과 밀가루 장려 포스터를 그려야 했던 시대였다. 

아버지가 소중한 분이라는 걸 나는 왜 하늘에 보내고 난 뒤에야 깨닫는 것일까.아버지가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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