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7월 13일 금. 가장 좋은 날
요렇게 써놓고서도 좀 무섭다. 무섭다고 표현한 것은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영화를 떠올려서 그렇게 쓴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일기장을 새로 구입해서 첫장을 어떠 어떠한 사연으로 장식하는 것은 크게 감탄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은 늘상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실로 1년 반이 넘도록 새롭고 신선한 기대감으로 일기를 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의 모든 자잘한 행위 예컨대 (시를 쓴다든가. 에세이, 감상, 작고 섬세한 일상의 메모, 감수성, 요리 기록 등등)
이러한 행위를 갑작스레 멈추듯 접어두고서 이리저리 알수 없는 현실의 실끝을 쫓아 오늘까지 왔다. 아마도
어느 일기 한 부위에
"여자는 돈을 벌기로 했다."에서 멈춘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 일기를 멈추고 생활전선에 빠져 일기를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감탄스러워하는 나의 폼이나 싱거운 안타까움, 연민, 사랑을 꾹꾹 잔인하게 밟아누르며 그 위에 냉정하고 과단함을 쌓아 올렸던 것 같다.
매몰찬 현실에 단지 그것도 현실의 부정적인 면, 모순된 면에 더욱 치중해 있었던 것이다.
가슴속에는 19살적보다 떨 따뜻하고 덜 놀라고 덜 감탄하고 더 차갑고, 아무튼 빈 어항속에 떠있는 공기 같았을까.
오늘도 예외없이 무언가 깨어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지냈는데 더 이상 잠도 피곤도 없자
나 자신을 보고 놀랐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간이 모습과 사치와 허영으로 뜬 돈만 되뇌이는 여자. 아귀같은 마음.
무튼 .... 난 뭔가 달라져 있었다.
7월. 오늘은 새로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은 보드랍고 연한 잎사귀같은 사랑의 감정을 가져보고 싶다.
꿈을 가진 여자가 간절히 되어보고 싶다.
이젠 말로만 그칠 게 아니라 되어 보는 실습을 해봄직하지 않는가.
이제 그럴 시기가 되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인아, 힘을 내!
플라타너스 주위를 혼자 서성이는 바람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가져 보아. 그건 부끄러운게 아니야. 여지껏 너는 무던히 그런 마음을 죽여왔어. 이제 마지막 남은 종자까지 너는 죽이려하지마. 이제 너를 살려보자.
나는 과거의 일기장 속으로 들어왔다.
무엇을 달라지게 할지 나도 모르겠다.
..
승의 아버지, 시아버지님. 내 펜에서 시아버님을 아무렇지 않게 문장에 집어넣는다는 것이 낯설고 뭔가 때이른 느낌이다.라고 일기는 쓰여있다.
가족을 떠나 서울로 온 나에게 또다른 가족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키가 145쯤 생각하고 나이는 18세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난 그때의 소녀가 아닌데... 여자라고 일명 아낙내가 된 것이다.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투다.
이 글들을 엮어 가게 되다보면 속속들이 과거를 꿰게 되겠지.
시아버님의 일들을 잘 해결 된 것 같다. 오후 4시쯤 넘어서 7번 버스를 타고 거무튀튀한 시아버님께서 밤일을 나가셨다.
승의 누나가 전화가 왔다.
아슬한 실수.
그냥 승과는 친구로서 지내는 듯 그녀를 속였다.
화곡동 아줌마는 승 아버지의 애인이다. 그녀는 승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지하방 1호실에 가끔씩 반찬을 해놓고 가곤했다.
나와 승은 지하방 2호실에 머물고 있다.
부엌이 따로 없고 그냥 방만 있다. 작은 창문으로 골목길이 보인다.
화곡동 아줌마는 나를 자신과 같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가엾고 한심한듯.
그녀는 자신의 생일이 4월에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생일을 기억해 선물이라도 챙겨줘야 하나.
나는 그렇게 고민해 보지만 승은 불충하게도 아무런 생각도 없다.
일을 나가지도 않고 연립 지하방에 그의 집에 숨어들어 신세를 지고 있는 나는 항상 어깨깃이 내려간 상태다.
승을 믿을 수 있을까. 그는 나이가 스물 둘이다.
언제든 나를 쫓아낼 수도 있다.
나는 남자를 믿지 않는 편인데. 승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을까?
온실의 꽃으로 있다가 하이드 벌판에 놓여진 꽃.
나는 캐더린의 혼령같은 모습으로 불안하게 잘자라고 말한다.
나는 꿈, 시, 그림 등 창조의 세계에만 관심을 두고 뇌를 활성화시킨다.
돈벌이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현실적인 능력치와 예술적 창작력이 높은 그 두가지를 병행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