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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ete Mar 11. 2016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들

인천공항에서 베를린으로

 하필이면 탁상시계의 알람이 그 날 아침 고장이 났었다. 그 바람에 계획보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서 허둥지둥 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시간은 촉박해서 조금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분주한 움직임이 꽤 잘 어울리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신이 났나 보다. 남겨 놓은 피곤은 비행기에 타자마자 기내식을 먹고 바로 곯아떨어지기 위해 좀 더 아껴둬야지.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서는 정말 괜찮은 계획라고 자찬했다. 여행을 시작하는 날! 오늘 입을 옷은 비행시간 동안 편안하게 입고 있을 만한 옷으로 미리 골라서 고이 접어 옷장에 넣어 두었다. 옷장 문을 활짝 열고 옷을 꺼내 입었다. 나머지 짐들을 빠르게 최종 확인하고는 캐리어의 지퍼를 닫았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을 위한 여행!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서다가 열어둔 옷장 문의 모서리에 찍혀 등에 커다란 상처가 났다. 좋은 날 아침, 시작부터 이게 뭐야 싶었다. 속상했지만 아파할 정신이 없었다. 늦을까 봐 다급한 마음이 아픈 것도 잊게 해 줬는지 상처가 크게 난 것도 비행기 안에서야 알았다.


 "엄마! 나 잘 다녀올게!"를 빠르게 외치며 부랴부랴 캐리어를 챙기고 크로스백을 멨다. 먼 곳으로 가는 딸을 위해 엄마가 차려놓은 따뜻한 아침밥은 눈 앞에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나가려는데 엄마가 "잠깐만!" 하더니 말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순간. 뭉클함이 가득 밀려왔다. 아늑하고 포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엄마의 품 속을 파고들며 온전히 그 따스함에 내 몸을 맡겼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눈빛으로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몸집만 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드디어 집을 나섰다. 미친 듯이 뛰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집에서 나와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나는 여행의 시작이라는 두근거림과 낭만을 느낄 새가 없었다. 늦을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과 식은땀을 가득 이끌고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 수속을 밟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빠, 엄마에게 공항이라고, 잘 다녀오겠다고 안부를 전했다. 친구들에게는 "비행기 옆자리에 훈남이 앉아 있었으면 좋겠어. 가벼운 대화를 하다가 서로에게 끌려 사랑이 시작되는 거지!"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잠깐 동안 달콤한 로맨스를 꿈꿨다. 그럼 정말 '엑설런트 플라이트'가 될 것 같았다. 정작 내가 앉은자리는 세 자리가 붙어있는 자리였는데도 아무도 앉지 않아서 나 혼자서 외롭게 앉아서 갔지만. 아니, 만약 누가 있었다 하더라도 비행기 안에서의 몰골은 처음 본 상대와 사랑에 빠지기는 힘든 모습이라는 걸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지만. 그래도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하는 재밌는 상상.



 비행기를 타기 전,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는 풍경은 잔잔하다. 비행기가 유리창 너머로 고요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내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눈 앞에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여행을 실감하며 설레기 시작한다. 진짜 떠나는구나! 하고. 티켓을 확인받고 탑승통로를 지나치는 순간 또 한 번 설렌다.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순간도, 비행기가 상공에 뜨는 순간도, 기내식이 나오는 순간도, 긴 비행시간을 함께 할 멀티미디어 기기를 작동시키는 순간도, 창문 밖 구름을 찍는 것도. 정말 사소하지만 온 신경이 고조되게 하는 순간들.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게 사실 맞지만, 더 절절히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런 일 쯤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려고 노력하지만 사실은 설레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시간. 열 몇 시간을 앉아있기에 몸이 찌뿌둥하지만 그것 조차도 오랜 비행시간을 잘 참아낸 증표 같아서 뿌듯하기만 했다. 긴 비행시간의 지루함과 여행의 설렘을 몇 번이고 사이좋게 교차해 지나갔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그렇게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들에 설레고 두근거리며 베를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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