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에 올린 리드 클라이밍 영상이 발단이다. 등반자를 하강시키는 영상. 빌레이를 보던 중 빠른 하강이 이뤄지자 깜짝 놀라서 그리그리의 레버를 멈췄고, 등반자가 더 무거웠기에 레버를 멈춘 순간 내 몸이 떴다. 하강시키다 말고 몸이 뜬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순간 센터에서 배웠던 리드 시스템은 1도 기억나지 않았다. 둥둥 뜬 몸을 고정시켜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왼손으로 홀드를 잡고 몸을 고정시켰다. 등반자를 내려줘야 하는데 왼손으로 홀드를 잡고 있으니 남은 손은 오른손뿐. 뒷자를 잡고 있던 오른손이 그리그리의 레버 쪽으로 향했다(오른손은 반드시 뒷자를 잡고 있어야 한다) 그때 다행히 누군가 오셔서 뒷자를 잡아줬고, 무사히 등반자를 하강시킬 수 있었다.
욕먹을 짓 해서 욕먹었다
자칫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빌레이어는 등반자의 목숨을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의 기술과 노하우, 집중력이 필요하고 위기 상황에서의 빠른 대처 능력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의 빌레이 점수는 0점이다. 아니 마이너스다. 초보라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순 없다.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면서 이 부분을 살릴지 말지 고민했다. 업로드하면 분명 누군가로부터 비판 혹은 비난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날의 등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그 문제의 빌레이 장면이었다. 잘하든 못하든 꾸준히 하는 클린이의 성장 영상을 기록한다는 채널의 초심을 잃기 싫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잘하는 것만 올려야 한다면 내가 유튜브를 운영할 이유는 없으니까.
익명 커뮤니티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글은 커뮤니티 분위기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계속 올라왔고 그때마다 나에 대한 이야기와 영상 좌표 등이 언급됐다. 그 사람들이 무작정 나를 비난한 게 아니다. 모두가 맞는 말을 했다.
위기에 맞서는 방법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내가 하는 일은 Public Relations. 즉, 회사에 대한 공중의 이해관계가 긍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전략을 짜고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일이다.
여기서부턴 나의 상상. 만약 비슷한 일이 회사에서 벌어진다면?영상이 업로드되지 않게 아예 원천 차단해야 했겠지만 이슈란 것이 늘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에서 터질 수 있으니 그래 일단 영상이 올라갔다 치자. 커뮤니티에 안 좋은 이야기들이 올라왔을 때 PR팀인 나는 이슈의 파급력과 중요도를 판단해야 할 거다. 특정 집단에서만 왈가왈부하다가 조용히 들어갈 정도의 문제인지, 사회적으로 크게 확산될 수도 있는 이슈인지. 이걸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액션 플랜과 사건의 흐름이 천차만별이 된다. 조용히 지켜보는 게 나을까,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게 더 좋을까. 만일 입장을 밝히고 해결 방안을 준비한다면 그 골든타임은 언제까지며 입장문의 메시지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 것일까.나 자신의 PR담당자가 되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봤다.
1. 사과의 첫 번째 대상은 등반자다 많은 기업들이 불특정 다수의 공중에게 사과하지만 사실 사과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먼저 향해야 한다. 나로 인해 위험에 처했던 등반자에게 먼저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 커뮤니티 이용자를 포함한 나머지 공중은 그다음이다.
2. 변명하지 않는다 초보라 그랬다, 나도 모르게 그랬다 등의 변명을 하면 안 된다. 억울하다고 변명하면 또 다른 논란이 생긴다.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 나갈지에 대해 알리는 것이 좋다. 내가 입장문을 썼다면 초보라서 그랬다는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3. 잘못된 사실은 바로 잡는다 팩트를 바로 잡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된 사실이 퍼지고 있다면 빠른 시간 내에 팩트를 알려야 한다. 나의 사건에서도 친구가 가만히 보며 촬영만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건 사실과 일부 다르므로 팩트를 전달했을 것이다.
4. 본질을 이야기한다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건 어쩌면 위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며, 동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촬영은 친구가 아닌 삼각대가 하고 있었다는 둥, 초보라 당황해서 그랬다는 둥, 이런 건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나의 빌레이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과 나의 지인들도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빌레이어를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부족한 실력, 대처 방안에 대한 무지를 사과하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5. 해결책을 제시한다 앞으로는 전문가 1인과 함께 등반하겠다, 관련 영상이나 서적 등 참고해 공부를 많이 하겠다, 더욱 안전한 환경에서 신중하게 빌레이를 보겠다 등 구체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한다면 더 좋은 입장문이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자기만족으로 유튜브에 운동 내용 기록하는 변두리 몸치 클라이머일 뿐이기 때문에 입장문을 쓰지는 않았다. 나의 대처 방법은 조용히, 묵묵히, 꾸준히 빌레이 실력을 향상하자는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못하는 모습을 유튜브에 올릴 계획이다. 그리고 언젠가 좋아진 빌레이 실력까지 모두 유튜브에 기록하겠다.
작년 가을쯤 빌레이가 너무 무서워서 아예 빌레이를 볼 수 없을 정도의 포비아가 왔었지만 그럼에도 리드에 대한 애정으로 극복했다. 이번에도 극복한다. 나는 진정성을 갖고 리드를, 클라이밍을 대하고 있다. 이 믿음 하나로 앞으로도 쭉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