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리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벤트성으로 톱로핑과 리드를 체험한 게 전부인 내가 클라이밍 시작 2년 반 만에 드디어 각 잡고 리드에 입문한 것.
리드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해왔다. 2년 반 동안 꾸준히 지구력과 볼더링을 했고, 지구력 루트만 있는 클래식 암장에서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한 덕에 지구력에 나름 자신감도 있었다. 마침 다니고 있던 센터에서 리드 강습반을 운영해 오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카드를 긁었다.
클라이밍은 팀워크가 필요 없는 운동이지만 은근히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분명 혼자 오르고 있는데 벽 밖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이스", "집중" 등의 응원소리와 더불어 "왼쪽으로 뻗어", "오른발 힐훅!"이라고 외치는 훈수까지. 혼자지만 함께 오른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훈수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 못할 것 같은 루트를 응원과 훈수 덕에 해내기도 하고, 반대로 나의 신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훈수를 곧이곧대로 들어서 실패하거나 멘탈이 털려 내려오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볼더링의 재미다.
리드에는 어떤 재미가 있을까. 사실 리드는 무섭다. 일반 사람 대비 운동신경이 많이 떨어지고(고등학교 체육 전교 꼴찌 출신), 신체의 움직임이나 장비에 대한 이해가 심하게 부족한 내가 새로운 종목을 시작한다는 것은 큰 도전임과 동시에 난제다. 특히 리드는 그리그리 등의 장비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몸치에 기계치에 방향치인 사람에게 장비 다루는 일은 부담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등반자와 확보자가 짝을 이뤄 진행하는 리드의 특성상 내가 못하면 상대방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도 공포였다.
부담과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이를 차치할 만큼 매력많은 운동이 리드다. 우선 실외라는 점이 그렇다. 실내에서 하는 볼더링과는 다르게 리드는 대부분 야외에 위치한 인공 외벽에서 진행된다. 가끔 볼더링 하러 가기엔 날씨가 아깝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리드를 할 때다. 하늘이 파랗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 리드하기엔 더없이 좋다. 15m~18m쯤 되는 외벽의 꼭대기를 향해, 파란 하늘을 보며 높은 곳에 오르며 느끼는 기분은 리드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이제 막 리드를 시작한 리린이가 느낀 리드의 매력이 또 하나 있다. 리드는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다. 외벽 등반 시에도 볼더링 할 때처럼 밑에서 루트 파인딩이나 자세 등을 도와주지만 한계가 있다. 어느 정도 높이에 올라가면 밑에서 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데다, 사람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늘어나니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하강을 하는 것도, 계속 등반을 하는 것도, 자세를 바꾸는 것도, 루트 파인딩을 하는 것도 오로지 내 선택에 따른다.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와 후회하는 것도 내 몫이고, 긴 루트를 완등 한 후의 성취감과 기쁨도 온전히 내가 누린다.
물론 리드에서 '완벽한 혼자'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완벽한 둘'이 더 맞다. 벽을 오르는 등반자와 아래에서 줄을 봐주는 확보자가 하나의 로프로 연결되니까. 하지만 연결되기만 할 뿐 확보자가 나의 선택에 개입할 순 없다. 확보자는 등반자의 호흡에 맞춰 줄을 내어주고 당길 뿐이다. '더 올라갈까', '무리하지 말고 여기서 내려갈까'. 고민의 지점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홀드와 벽뿐. 나의 선택을 돕거나 영향력을 가할 사람은 없다. 벽에 오르는 순간 모든 선택은 등반자의 몫이 된다.
지금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 왔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사실 ENFJ인 내가 주변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한 선택을 한 일은 드물다. 살면서 완벽한 혼자가 되어 나만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있을까. 취업, 이직, 연애, 결혼, 심지어 점심메뉴를 선택할 때조차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리드를 할 땐 모든 걸 나의 사고에 따라 결정한다. 남은 완벽히 배제된다. 리드를 '클라이밍의 꽃'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으로 완등 했을 때의 기쁨이 꽃같이 아름답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