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May 02. 2021

나는 무기력해지면 할머니를 떠올린다.

내가 만난 가장 감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인 사람

원하지 않는 결과들을 헤치며 듣고 싶은 말을 기다리는 긴 시간 속에 언제부턴가 나는 염분 100%의 간장에 담긴 장아찌처럼 깊게 졸아들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 햇빛을 쐬고 긍정의 바이브가 감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이에나 마냥 찾아다닌다. 나도 그들처럼 조금은 그 바이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다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겨버리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한다.


열한 살의 나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일이 있다. 전신마취의 긴 수술을 받고 병원 생활을 했고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와 나를 간병해주셨다. 입원 생활의 어떤 날엔 약을 먹기가 싫어 병실이 떠나가게 울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먹어야 한다고 어떻게든 내게 약을 먹이려고 했다. 약을 먹자마자 약의 역한 냄새 때문에 바로 토해내 버렸다. 토사물이 내 몸과 할머니의 몸과 병실 이곳저곳에 묻혀버리게 됐다. 할머니는 '아이고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며 급히 내 몸을 닦고 병실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나는 또 슬프고 당황스러워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잠이 깬 나는 할머니한테 심심하다고 말했고 할머니는 그러면 일본어를 가르쳐준다고 했다. 아빠는 '치치' 엄마는 '하하' 라며, 따라 해 보라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설마 한 음절이 반복되는 단어로 아빠와 엄마를 부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할머니, 거짓말! 치치가 왜 아빠야?'라고 말하니까 할머니는 정말 치치가 아빠가 맞다며, 계속 따라 해보라고 했다.


부끄러운 일도 하나 떠오른다. 열여덟 살의 나는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철없이 '그래도 레슨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부모님에게 입시 레슨을 받고 싶다고 졸랐다. 처음 받은 입시 레슨은 생각보다 즐겁지 않았고, 선생님도 무서웠다. 갑자기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집안 사정도 안 좋은데 내가 잠시 미쳤나 보다 라는 생각에 레슨을 포기하기로 했다. 높은 금액의 레슨비는 이미 지불을 해버렸다. 이미 난 알아서 잘하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레슨을 받지 않고 남은 레슨비를 환불하겠다고 선생님께 말하기엔 너무나 겁이 났다.


어떻게든 가계를 지탱하느라 바쁘고 힘든 엄마 아빠를 도와주러 할머니는 또 서울로 올라와 우리 집에 함께 있었다. 같은 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기 전에 이 일을 말하고 다시 환불을 받아야 하는데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고 말을 했다. 할머니는 '그럼 할머니가 전화해서 환불해달라고 해줄게'라고 바로 말했고, 다음날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레슨 선생님께 전화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나머지 레슨 비용은 환불을 해줄 수 있겠느냐'라고 요청을 했고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하는 동안 상황을 난처하게 만든 내가,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하지 않았어도 될 미안할 말을 하게 만든 내가 너무 싫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끝내는 눈가가 시큰해졌다.


2008년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 저녁 할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난생처음으로 대선에 투표를 하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알고 내게 어떤 후보를 찍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고, 내 선택이 실망스러웠는지 할머니는 나는 그 후보가 아닌 다른 후보를 찍었고, 너도 내가 찍은 후보에 한 표를 줬어야 했다고 아쉬워하셨다. 나는 그게 뭐 별건가 싶어 '할머니, 투표의 자유가 있는 나라예요~ 내가 찍고 싶은 사람 찍어야지~' 하면서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엄마는 '하여튼 니네 할머니 손녀한테 누구 찍었냐고 전화해서 물어보기까지 하고 참 열정적이야~' 라며 싱긋 웃었다. 또 어쩔 땐 어떤 교수님 때문에 속상해하는 나를 보며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


몇 년 후 할머니는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잘 보지 못했던 몇 년간 할머니는 많이 아파졌고, 기운을 잃어갔다. 다른 할머니 답지 않게 활기차고 조금은 고집 있던 눈빛이 점점 흐려지고, 노년이래도 언제나 검었던 머리카락은 깜짝 놀랄 정도로 하얗게 변해버렸다. 누구의 부축 없인 앉고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를 알아보고 또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작년 2월 그렇게 떠났다.


요즘 나는 맞닥뜨리는 일마다 희망과 환희와 실망이 계속 오가고 있다. 그리고 우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지쳐서인지는 몰라도 무기력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이상하게 나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이럴 때마다 어떻게 그런 시간을 보냈을까. 나의 토사물을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치울 수 있었을까, 난처한 환불 요청 전화를 어떻게 그렇게 하신 걸까, 2008년 대선이 나에게는 인생 첫 대선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전화를 해서 물어보신 걸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무엇이었을까. 일단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움직이는 할머니의 열정은 왜 내 DNA에는 없는 걸까.


첫 손녀의 기쁨에 매일 옷을 갈아입히고 손을 잡고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상인들에게 내 손녀라고 자랑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무기력해질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나는 이유는 아마 이 보다 더는 슬퍼지지 않게, 할머니 당신이 바로 행동했듯 조금이라도 나를 움직이게 하려고 하는 내 내면의 반작용 일지는 모르겠다. 만약 지금까지도 할머니가 건강하게 계셨다면 집안 이리저리 움직이고, 먼지를 훔치고, 요리를 하고, 옷을 만들고, 성당을 다니며 바삐 지내셨을 테다.


할머니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다가 이제야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무기력한 순간이 있었던 덕분에 말이다. 내가 본 사람 중 매사에 가장 감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인 사람, 우리 할머니. 여기에는 없지만 힘든 현재에도 나를 기억으로 위로해주는 우리 할머니. 나는 할머니처럼 다시 한번 움직여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이 말했다. 속상한건 빨리 빠져나오는 거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