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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un 01. 2023

스티커의 마음

나의 작은 세상을 색칠해주는 스티커라는 존재

샌디라이온이라는 해외 스티커 브랜드가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생일, 크리스마스, 핼러윈 등 다양한 소재로 반짝거리고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그 스티커는 유치원 아니 초등학교 여자 아이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했다. 나와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던 친구 A가 있었는데, 그녀의 아빠가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샌디라이온 스티커를 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자주 그 스티커들을 보여주며 나와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또 어느 날은 스티커 북이라고 해서, 여태껏 모은 샌디라이온의 스티커를 한꺼번에 붙여서 보관할 수 있는 책을 보여줬다. 책이라고 하기엔 그냥 책의 형태를 한 스티커 보관 노트라고 해야겠다. 양면이 모두 반질반질하기 때문에 스티커를 붙였다 떼어도 접착제가 묻어나지 않는 그런 노트다. A는 갖고 있던 모든 스티커를 붙인 걸 보여주며 자랑했다. 나도 그 스티커를 갖고 싶은 열망이 더욱 커져갔다.


‘나도 하나만 주면 안 돼?’ ‘안돼.’ 단호했다. 어쩐지 A는 더욱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아 얄미워 보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샌디라이온 스티커를 문방구에서 팔긴 했지만 아무래도 국산이 아니다 보니 가격이 비싸서 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사달라고 해도 엄마 눈에는 한낱 작은 종이쪼가리, 언젠가 쓰레기가 되어버릴 그런 거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사줄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내 아빠도 해외 출장을 갈 일이 없는지 물어봤지만 당시 아빠의 직업은 전혀 해외 출장을 갈 이유가 없는 직업이었다. 나는 지금보다 그때가 더 사대주의였던 것 같다. 종종 나의 친구들에게는 미국 이모, 미국 고모가 있었는데, 그들에겐 꼭 얼마 전에 미국에서 살던 이모가 한국에 놀러 왔다며 맛있는 초콜릿을 받았다고 학교에 갖고 와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줄까 말까 하는 유치한 밀당을 했다. 또 90년대 중반 당시, 해외여행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때라 그런지 또 다른 친구는 사이판이라는 내겐 듣도 보도 못한 데를 여름방학에 갔다 왔다고 자랑했다. (아니 ‘사이판’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있다고? 하는 정도의 문화충격 같은 거였다.) 나는 스티커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었던 그것들이 예쁜 스티커를 보듯 반짝 여보였고, 갖고 싶었다. 우리 아빠는 해외 출장을 갈 일이 없고, 내 친척 중에는 외국에 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것들이 다 샌디라이온이라는 곳에서 나온 스티커들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가져가지 않을 수 없다 (...)


머리가 점점 커지고 나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살 수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을 때, 나는 옷 다음으로 스티커를 샀다. 카페나 식당 등에서 증정용으로 주는 브랜딩 스티커도 강박적으로 챙겼다. 기술은 점점 나처럼 스티커에 대한 열망을 가진 성인이 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함락당하듯 보여주었다. 샌디라이온을 좋아했던 그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도 있었겠지) 은 이젠 자신이 그 예쁜 스티커를 만든다.


스티커는 줄에 맞추어, 색에 맞추어, 모양에 맞추어 정렬이 되어 나오기도 한다. 정렬된 모습 그 자체 또한 어찌 안 아름다울 수 있을까. 또 어떤 스티커는 한 장 안에 큰 스티커와 작은 스티커들이 옹기종기 불규칙적으로 하지만 서로의 거리는 지키면서 붙어있다.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 자체로 귀여운 거다. 만약 거기에 한 장을 떼어내 내 다이어리 또는 어딘가에 붙인다면? 누군가에게 한 장을 꼭 줘야 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몸의 살점을 마취 없이 뜯어내는 그런 고통스러운 아까움 같은 게 있다. 한 장을 떼어내고 남은 그 빈 흔적엔, 그 자리엔 그 예쁜 것이 다시 내 손에 없을 거라는 걸 아니까.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에 스티커가 한 장 두 장 쌓인다는 것을 절대 얕봐서는 안된다. 중간 사이즈의 종이봉투에 고이 보관해서 그냥 한 장씩 사서 넣었을 뿐인데 어느새 누적되어 빵빵해진다. 스티커에 대한 나의 애틋한 마음을 알지 못하는 엄마는 왜 그 ‘쓰레기’를 안 버리고 그대로 두는지 이해가 안 되는 가시나라고 툴툴거리며 잔소리를 할 뿐.


한 번은 정성스레 모은 스티커를 자발적으로 다 버린 적이 있긴 하다. 갑자기 현타가 와서 그랬던 것이다. 쓰지도 않을걸 왜?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후련했다. 조금의 여유공간이 생긴 내 방이 싫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처럼 스티커를 강박적으로 사진 않는다. 일러스트페어에 가서도 정말 정말 마음이 가는 것들만 산다. 하지만 저것도 사고 싶은데… 참아야지 하는 마음은 너무나도 힘들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는 LP를 모으고 누구는 운동화를 모으는 것처럼 나는 스티커를 모으는 거다. 유독 스티커에 대해서 박한 시선을 주는 이가 있다. 운동화보다 LP 보다 상대적으로 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싸서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어딘가에 애정이 있다는 게, 감각이 무뎌지게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타인의 취향이나 취미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일한 대가로 받은 수입의 아주 일부분을 지출해서 사는 스티커. (때론 지나치게 지출할 때도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 따위’라고 누군가에겐 보일 그 스티커가 나에게는 삶의 작은 행복 중 하나라는 걸.


ㄴr는...30○l 훌쩍 넘øł도...스티커를 산⊂ト...


그렇기에 나는 말한다. 스티커를 너무나 좋아하고 책상 서랍에, 아니면 자기 방 어딘가에 고이 스티커를 모셔놓고 사는 어린아이가 당신에게 스티커 한 장을 떼서 준다는 건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결코 채도를 낮추지 않고, 다양하고도 복잡한 동시에, 귀엽고 아름다운 것.

어딘가에 붙일 수 있다는, 접착력이 있다는 것.

그렇다고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스티커는 그것만으로도 존재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그리고 꽃말은 ‘특별하게 너만 사랑해’ 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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