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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퇴물 Jul 29. 2020

35살 내 대학 동기는 00년생

Garment dyeing

휘향 찬란한 명품들 속 하루는 홀로 은은한 색감을 풍기는 옷이 눈에 띄어 살펴 보니 '가먼트 다잉(garment dyeing)' 이란 설명이 적혀 있었다.  


가먼트 다잉이란, 색실로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흰옷에 염색 하는 작업을 일컫는데 그 과정에 있어 고열로 인한 수축 혹은 염색의 균일함을 맞추기가 어려워 고난도 의류 제작방식에 속한다.


즉, 손이 많이 가는 노동이지만 온도, 염도, 염색제 모두가 조화를 이루고 수많은 물들임을 통해 완성되면 일반 색상보다 훨씬 오래가고 은은한 색상을 지니게 되는 옷. 한마디로 노동이 기술을 만나 예술이 되는 게 가먼트 다잉이였다.


서른 살 즈음, 익숙해지고 스스로 얼추 완성되었다 생각했건만 실은 제대로 된 색깔 하나 없던 무색의 옷 그게 딱 나였다. 그리고 늦깎이 대학생활이 처음으로 색을 물들인 그 시작점 이었다.

얼마전 마무리한 첫 학기는 4.4점이란 좋은 성적을 받았고 회사 다닐땐 막연히 생각만했던 철인3종(아이언맨) 코치 자격증도 땄다. 특색 없던 10년간의 생활을 6개월 남짓 다른 물에 담가놓았다고 확연히 바꿔질리는 없다만 결과만 놓고보니 나름 색감을 띄기 시작한 것 같다.


'내일 뭘 입고 가지?'

첫 등굣날의 기대감과 걱정은 여느 신입생과는 사뭇 달랐다. 띠동갑 넘게 어린 동기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 해도 여전히 짙게 배어있을 그간의 사고와 행동방식은 티가 날 테니 말이다.

전전긍긍하는 내게 소풍 전날의 들뜬 아이 같다고 그리고 동안이라 괜찮다며 아내가 위로를 한다. 띠동갑을 넘어선 동안이 있을 리 만무하며 어려 보인들 아재 티가 안 날까만 그래도 그 응원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처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모든 아이들이 일어서 내게 인사했음을 게다가 교수님 또한 나보다 한 살 어렸단 사실은 그간 했던 모든 걱정이 부질없었단 걸 깨닫게 해 준 순간이기도 했다.


'이게 가능했던 건가'

사실 외모도 외모였지만 5월이나 돼서야 느지막이 열렸던 수업까지도 등교 대신 출근이란 말이 편했을 만큼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어려웠다. 그러는 가운데 첫 중간고사가 다가왔고 한 시험과목에서 실수를 범해버렸다. 여지없이 탈락이구나 싶던 찰나 교수님이 한번 더 기회를 주셨고 멈칫 당황했지만 재답변 후 통과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왜 멈칫거렸을까? 그리고 내게 '실수'가 용납되던 게 과연 얼마만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엔 실수가 만연했고 이어진 용서는 어찌 보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조금씩 사회로 나갈 채비를 해나갔다. 반면 회사생활 동안엔 고년차였던 난 실수가 곧 실패로 인식된 지 오래였기에 두번째 기회가 주어졌던 그 상황과 결국 용납되었다는 사실이 꽤나 신선했다. 구태여 비유하자면, 오랜만에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곤 '이게 이런 맛이었지'라 느끼는 향수(鄕愁)라면 그게 향수였다.


얼마 전, 옛 동료와 만난 술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회사 다닐 때~' 란 말 대신 '학교 다닐 때~'가 튀어나와버렸다. 고새 학생이 다 된 거냐며 웃는 동료를 보며 '이제야 난 회사원이 아니구나'를 실감했다. 연초에는 어떻게 학교에 가나 걱정도 하고 앞날이 막막하기도 했는데 어느덧 그 길에 들어선 나를 처음으로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반년 남짓의 시간, 물론 처음에 비해 조금은 바뀌었다 해도 실은 딱 한번 염색제에 담갔던 옷에 불과하다. 그 한 번은 결코 예술이라 부를 수 없는, 노동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그 상태로 놔두면 그마저도 얼룩에 불과할 거란 걸 안다. 무색의 회사원을 학교라는 첫 염색약에 잠시 담가본 셈이었다. 앞으로 몇 번 또 몇 년을 담가놔야 그간 깊이 박혔던 사고가 바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될진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허나, 그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명품 반열에서 자신만의 은은한 색깔을 내보이는 사람이 될 거라 꿈꾸고 싶다. 그때 가먼트 다잉처럼 말이다.


한가지를 하면 다른 한가지에 소홀해지는 편이라 글쓰기가 잦지 않아 고민이다. 다행히도 늦깍이 대학생에겐 우여곡절이 참 많은데 언제 다 옮기려나 싶다. 어여 한번 더 담그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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