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실려오는 통가죽 냄새, 시트러스 향이 은은히 배어 나오는 매장 카펫.
샤넬, 에르메스, 까르띠에, 티파니, 루이뷔통, 구찌 ··매장 앞을 지날때마다 코 끝으로 느껴지던 각기 다른 향이 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모든 MD(buyer)라면 한번쯤은 일하고 싶어 하는 명품郡. 또 모든 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사치품. 그 선망의 반열에 서 기백만원의 가방부터 수 억에 달하는 시계를 사는 고객들을 만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춰 준비를 하는 일. 한 달에 홀로 담당했던 매출액이 약 100억에 달했던 내게 '억'이라는 단위를 입에 올리던 게 참 가볍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매장에서 풍기던 그 '부富'내음이 자연스레 느껴지던 내가 제일 좋아하던 브랜드는 역설적으로 '유니클로'였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일이라 조금도 으쓱대지 않았다라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담당하는 일에 자부심이나 애착이 있진 않았다. 모든지 극과 극은 통한다 하던가? 험한 환경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때론 섬뜩할 때가 있듯 부의 극치에 사는 사람들 모습 또한 그러했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마 애착이 더 없어졌던 것 같다.
'왜 안되는 거야?'
압구정에서 일하던 당시, H브랜드 상위 1% 고객의 컴플레인이 접수되었다. 모 그룹사의 사모였던 그녀는 방침상 불가함이 왜 불가함인지 이해를 못했고, 당신에 비하면 그저 일개 회사원에 불과한 내게 불가능을 요구했던 날이었다.
불가함이 왜 불가함인지 모르는 사모와, 죄송하지만 왜 죄송한지 모르던 나의 기나긴 대치 끝에 그냥 '우리 그룹사 회장'에게 직접 얘기하겠다며 매장을 나가던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연한 하대를 했다. 그리고 그날부로 그득히 풍겨대던 H사의 향수는 내게 아픈 향으로 각인되었다.
'돈 냄새'
'세상에서 돈 냄새가 가장 지독하다'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수많은 이들의 손을 지나쳐 장롱 안에 켜켜이 쌓인 돈에서 무척 고약한 냄새가 났다는 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매장에 오는 돈은 단 한 번도 그런 적 이 없었다. C사 시계를 구매하고자 했던 고객이 내민 것은 카드가 아닌 5만 원권이 그득한 쇼핑백 꾸러미였고 빳빳하게 쌓인 돈은 정작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영수증조차 거부했던 그 돈은, 내 생을 다 합쳐 일한 액수보다 많은 돈이었건만 땀 한 방울의 냄새조차 안 묻어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눈앞에서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다큐가 상영되었다. 고객의 관점에서도 또 내 관점에서도 상영되는 쌍방향 다큐였다. 뭔가 뒤가 구릴 것 같은 돈뭉치에선 정작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고, 되려 좋을 거라 생각했던 향수가 역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아픈 이들에 겐 명품이 그저 물건을 넘어서 아픈 마음을 둘러감 쌀 수 있는 유일한 반창고 같았고. 남을 아프게 하는 이들에겐 돈이 그 죄책감을 메워 줄 명분이 되는 듯했다. 내가 알던 선입견이 차차 바뀌어갔다.
실제로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있어, 나 같은 실무경험이 있으면 그 시간을 자격으로 대체인정을 해준다. 그럴 정도로 누군가의 선망이 되던 번지르르한 명품은 실은 누군가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공간이었다.
'살 냄새'
재활트레이너가 되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요즘도 향을 맡곤 한다. 치료를 하러 몸을 맞대면 사람마다 다른 향수, 다우니나 피존과 같이 다양한 향이 난다. 아직은 그 대상이 고객(환자)이 아닌 실습을 하며 마주하는 같은 학생들에 불과하지만 아픔을 다룬다는 점에 있어선 예전의 그 직업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다만 하나 다른 점은 그 끝이 윽박이나 하대가 아닌 고마움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짧으면 내년부터 환자를 만나 다시금 아픔을 다룰 것 같다. 뭐 그 안에서 느끼는 고충이야 매한가지겠지만서도 기대하는 건 아픔이 단순히 메워지지 않고 치료된다는 점과 그들에게 감사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에 대한 실망이 아닌 보람을 찾아가지 않을까 싶다.
오늘 오래간만에 백화점을 들렸다 코 끝에 느껴지는 향수가 옛 향수鄕愁를 불러온다.
전국의 모든 감정노동자들을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