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두 번째 이야기] 런던 스케치
사실 런던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나보다 먼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선배가 기념품이라며 사들고 온 런던시티 컬러링북 때문. 배낭 하나를 달랑 매고 교환학생을 떠난 내가, 생필품 중에서도 완전 생필품인 몇 가지의 물건만 챙겨 온 내가, 누가 봐도 쓸데없는 물건인 런던 컬러링북 한 권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위해 열심히 색칠하고, 또 색칠했다. 그 컬러링북에 나온 런던의 명소에 찾아가 함께 사진을 찍을 셈이었다. 나름 독특하다고 자부심 갖고 시작한 여행 콘셉트이지만 누가 보면 돈 낭비하는 정신 나간 여자인 줄 알겠지. 나도 알아!
덜덜덜덜덜덜덜드득드득푸끼이익!
‘내가 바로 저가 항공이오!’라고 뽐내는 라이언에어는 언제나 그렇듯 생명을 위협하는 착륙 묘기를 보인다. 왕복 8만 원의 비행기 값이면 이 정도의 공포는 감내할 수 있다. 공항에서 내려 시티센터까지 가는 버스를 찾다가 3명에 한 팀이면 할인 가격이 적용된다는 문구를 보고 그 자리에서 생전 처음 본 사람들과 팀을 만든다. 마치 의자 게임 같았다. 5명 중에서 3명만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그런 눈치 게임이 버스 티켓 판매처 앞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나는 할인 가격으로 버스를 타고 시티로 향했다.
여행은 다니면 다닐수록 숙련되는 것 같다. 첫 해외여행이었던 러시아 여행 때엔 그렇게 무섭고 눈물이 나더니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를 거쳐 벌써 6번째 여행을 떠나는 지금은 두려움은커녕 약간의 긴장감도 없다는 게 오히려 흠이다. 처음부터 별 기대 없었던 여행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걱정과는 달리 아주 깨끗한 날씨다.
런던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마치 여자의 갈대 같은 마음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는 탓에 일기예보마저 시시각각 바뀐다. 어차피 틀릴 것이고, 틀려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니 기상청이 필요 없겠다. 내 손에 우산 하나만 들려있으면 그만이다.
런던에 막 도착한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볕이 참 좋다. 에스토니아에선 날이 항상 흐린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높고 푸른 하늘, 그리고 따뜻한 햇볕이었다. 그러나 이 행복감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막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려는 참에 비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 이때야. 그래도 이래야 런던이지 하며 기쁜 마음으로 비를 맞았다.
영국의 흐린 날씨에 대해 익히 들어와서인지 비가 오는 이 우중충한 날씨가 싫은 게 아니라 이 나라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숙소로 향하는 이때를 제외한 나머지 5박 6일 내내 화창한 날씨였다는 것. 여행하기에 아주 완벽하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곳
한국에서 보행자로서 길을 거닐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일반도로에서는 물론 횡단보도에서까지도 언제나 보행자가 먼저 조심해야 한다. 가끔씩 주변을 미처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다 운전자에게 욕먹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나라에서 살다가 북유럽 여행을 해보니 교통 선진국답게 사람이 우선이었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는데, 사람이 우선이다 못해 자동차를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가 지나가는데도 스마트폰에만 몰두하며 걷는 보행자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러니 차들이 오히려 벌벌 떠는 일이 많다.
영국도 우리나라처럼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중심인 교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아마 그 차이는 ‘바쁨의 정도’에 따른 차이인 듯하다. 인구밀도나 생활환경이 비교적 여유로운 북유럽과 달리 1년 24시간 바쁜 도시에서의 지저분한 교통질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고작 2개월을 교통 선진국에서 살았을 뿐인데 이곳에 오자마자 쌩쌩 달리는 차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란다. 영국은 우리와 달리 도로 체계가 반대로 되어 있어 더 헷갈린 탓에, 차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미쳤냐고 욕을 먹고, 또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너면 이것대로 욕을 된통 먹는다. 자동차 질서만 엉망진창인 게 아니다. 보행자 교통질서도 엉망이다. 빨간불에도 건너고 파란불에도 건널 수 있는 나라가 이곳이다. 자국민들부터가 그러니, 다른 나라 관광객들도 질서를 지킬 리가 없다. 신호등이 서 있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도입했으면 하는 몇 가지의 교통 문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보행자도로와 자전거도로를 완전히 분리해놓은 것. 덕분에 내가 보행하는 동안, 자전거가 달려오진 않을지에 대한 약간의 공포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는 길거리에 설치된 관광객을 위한 지도다. 따로 지도를 가지고 다닐 필요 없이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이 지도 판은 아주 쉽고 명확하게 위치를 표기해서 상당히 유용했다. 서울에서도 이런 도로 위의 지도 판을 본 적이 있었는데 관광객 입장에서 보자면 알아보기가 어렵고, 또 보기 싫을 정도로 더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섬세함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겐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겠다 싶었다.
런던 스케치
사실 서울에서 수년간 살았지만 그동안 놓치고 지낸 서울의 모습들이 많다. 가끔 그런 모습들을 인지할 때면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하며 놀라곤 한다. 예시를 들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진 않으니 패스. 반면 관광객들이 오히려 이런 부분들을 찾아낼 때가 많다. 아마 여행이 주는 여유 덕분이겠지.
여행자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 나는 여행을 할 때면 한 곳에 가만히 앉아 한 시간, 두 시간 주변을 둘러보곤 한다. 그러면 내가 앉아있는 그 장소에 대해서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일상 또한 관찰할 수 있다. 요즘 이곳에서 유행하는 패션은 무엇인지, 이들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아가는지. 그래서 내가 쓰는 여행 일기에는 보통 어떤 관광지에서 무엇을 봤다기보다는 순간순간 관찰했던 것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느낌이 많다.
런던 시내에 도착해서 느꼈던 첫인상은 서울과 같은 활기참, 그러나 그 이면의 바쁨이었다. 출근길에 이들과 함께 길을 나서다 보면 빠른 발걸음에 무거운 표정을 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출근길의 모습이다. 길을 묻고자 한 사람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바쁘다고 지나친다. 또 한 사람들 붙잡자, 그녀 또한 미안하다며 지나치고 또 한 사람이 그렇게 지나치고 나니 나도 진이 빠져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길 잃은 불쌍한 여행객은 안중에도 없나 보다. 그래도 출근길에 정장을 쫙 빼입은 영국 남자들이 너무 잘생겨서 그들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여행을 하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영국인의 사과 습관이었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이것이 이들의 예절이자 습관인가 보다. 아마 이들이 평생 살며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6일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고.
런던 곳곳을 구경하다 보면 인상 깊은 점들이 참 많다. 우선 길바닥에 새겨놓은 명언 등의 글귀가 예쁘다. 길을 거닐면서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매력이지만, 글씨체도 참 예쁜 것으로 골랐다. 한글로 쓰인 좋은 글귀가 새겨진 우리나라의 보행로를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이곳의 도로보다 훨씬 예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사소하지만 거리 디자인이 도시 이미지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런던아이도 인상 깊다. 이 상징물 하나가 런던 전체를 대표하는 듯하다. 물론 런던아이 같은 비슷한 건축물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기에 독창성은 좀 떨어지지만, 이것 하나로 런던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도 이런 랜드마크가 있으면 좋겠다. 외국인들에게 서울 하면 어떤 건물을 먼저 떠올릴까? 설마 남산타워는 아니겠지.
생각보다 일본 음식점이 굉장히 많다. ‘와사비’, ‘잇츄’라는 일식 체인점들이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식당엔 매 시간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거리에서 일식집을 자주 접하니 괜히 일본에 대한 친숙함이 느껴진다. 영국에서 느끼는 일본이라니. 음식으로 이렇게 강한 친숙함을 줄 수 있다니, 한 편으론 한식집은 안 보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
일 년 전 이맘때 이런 생각을 했다.
이곳은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인종도 다양하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저임금 저 숙련의 일자리의 경우 이주민들이 맡고 있었고, 시내에 들어선 빽빽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산다는 것은 그 나라에 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 어느 책에선 이주민의 노동력을 통해 현대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렇게나 다양한 문화와 관점들이 뒤섞이다 보면 그만큼 많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일 년 뒤인 지금, 브렉시트 이슈가 터졌다. 그때 런던이라는 도시를 거닐며 표면적으로나마 봤던 모습들이 사실은 그들의 내면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나는 행군의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해야만 했다.
러시아 횡단 열차 여행부터 온갖 거지 여행은 다 해본 나다. 원래 모험 같은 여행을 즐기는 성격 탓도 있지만, 내가 가진 돈의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나라를 다니고 많은 경험을 하고자 하니 벌레가 나오는 숙소, 일주일간 빵 식사와 대중교통 없이 하루 10시간씩의 행군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름대로 재밌긴 하지만 솔직히 해변이 보이는 호텔에서 맛있는 브런치를 즐기고 예쁜 옷을 입고 자가용으로 달리면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고 싶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국토대장정 하는 몰골의 배낭여행객. 뭐 나쁘진 않다. 이때가 아니면 또 해볼 수 없는 경험이니.
그래도 이번 여행은 지난번 여행 때보다는 잘 챙겨 먹고 있는 편이다. 확실히 물가가 비싸긴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이미 물가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인지 영국 물가가 싸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테스코로 향하고, 유통기한이 몇 분 남은 0.25파운드짜리 샌드위치를 집어 든다.
대부분의 끼니를 대신했던 샌드위치와 유일하게 4만 원이라는 거금을 쓰고 먹었던 랍스터 요리.
런던 공항에서의 마지막 밤
비행기 시간이 애매했던 이유도 있지만 숙소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마지막 날 밤은 공항 노숙을 했다. 처음엔 정말 설렜다. 공항 노숙은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들뜨고 신나는 마음으로 공항 곳곳을 기웃거리고 내가 밤새 자리 잡을 곳을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이 되자 온도가 뚝 떨어졌고 추운 바닥에서 자려고 하니 잠도 안 오고 몸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미 카페와 레스토랑은 공항 노숙자들로 만원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돈을 조금 더 쓰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이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에스토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저가항공 라이언에어다. 다시 한 번 생명의 고비를 넘기고 나서 무사히 착륙했다(X), 살아났다(O). 그리고 갑자기 들리기 시작한 에스토니아어는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게 한다. 또다시 주변의 모든 것을 읽을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세계로 돌아오니 벌써부터 아쉽다.
아참!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여행을 다니면서도 가장 많이 신경 썼던 컬러링북 콘셉트의 여행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이 콘셉트의 여행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6일 간 고생했기 때문에 사진이라도 남겨본다.
- 런던 여행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