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공감 능력자 (2)
다국적 IT기업 <앨런>의 한국 지사 연구원이 위치한 경기도 모처. 옥상에서 저 먼 하늘과 연구소 경계에 우거진 숲의 나무들이 만들어낸 경계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곁에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 친근하게 ‘씩-’ 웃으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야, 구윤회. 퇴근시간 다 돼 가는데 뭐하냐?”
“아, 책임님...”
“야 인마, 둘만 있을 땐 그냥 형이라 부르라니까. 꼬박꼬박 책임님, 선배님 하지 말고. 그럼 나는 수석님이라고 불러야 하냐?”
윤회라 불린 사내가 쭈뼛거리며 옆을 돌아보니, 씨익 웃고 있는 책임 연구원 이중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중훈과 구윤회의 인연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본사에서 이뤄진 콘퍼런스에서 첫 만남, 두 번째는 본사의 짧은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미국에서 몇 달간 함께 지내면서 가까워졌다. 중훈도 윤회와 동갑인 동생 시훈이 있어 동생 같이 느껴져 많이 챙겨줬고, 윤회도 그런 중훈을 형처럼 잘 따랐다. 그리고 중훈 본인이 책임 연구원으로 승진하며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본사에 윤회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윤회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겪어본 바 그의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형님... 죄송해요. 워낙 습관이 되어서. 그리고 다른 팀원들 때문에 더 신경 쓰느라고요.”
“한국 생활은 좀 어때? 많이 익숙해졌나? 여전히 잠을 잘 못 자나?”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무안해하는 윤회가 귀여워 보이는지 벙글벙글 웃던 중훈이 말을 이었다.
앨런 연구소는 경기권 중에서도 서울에서 먼 위치에 존재했다. 오히려 세종시가 서울보다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연구소가 이전함에 따라 인근에 신도시 공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생활 인프라가 편안한 수준은 아니었고, 그 때문에 윤회도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다른 신도시에 집을 구해 생활하고 있었다.
“이제 좀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시차 적응도 다 됐고... 근데 여전히 밤에 자다가 자주 깨서 수면의 질이 그리 좋지는 않네요... 그래서 그런지 몸도 피곤하고요.”
“야, 좀 돌아다녀. 너 또 회사 – 집 – 회사 – 집 이러고 있지? 그러니까 병나는 거야. 고국에 몇 년 만에 다시 왔는데 떠나기 전보다 변한 한국의 모습도 즐기고, 주말엔 집에 틀어박혀 책만 보지 말고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디든 좀 돌아다니라고.”
“원래도 제가 그런 스타일은 아니...”
“아니어도 해봐. 나중에 되면 할 수도 없는 때에 해보고 싶어질 수도 있어. 나처럼 처자식 생기고 그러면 하고 싶어도 못 해. 그러니 해보라고.”
“...”
중훈의 권유에 윤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싫다’ 소리는 못하고 입을 꾹 닫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으므로. 그런 윤회의 스타일을 중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나름 국제기업에서 한 거점 지사의 책임 연구원까지 달려면 사내 동료들 캐릭터들을 깨알같이 파악하는 능력은 기본이었다.
“잠 문제는, 내 동생 시훈이 기억나지? 걔한테 방문해서 약 좀 처방받아. 내가 시훈이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꼭 가고.”
“... 네...”
중훈의 동생 시훈은 국내 탑 3에 드는 종합병원의 신경정신과에서 펠로우로 일하고 있는 의사였다. 별 일이 안 생기는 한, 교수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펠로우. 거의 반 강제인 권유였지만, 윤회는 한국에 오자마자 중훈에게 소개받은 시훈이 싫지 않았다. 친구가 된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지만, 내성적인 그가 먼저 시훈에게 친구처럼 지내자고 할 수는 없었다. 시훈이 먼저 손을 내민다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뿐...
토 · 일을 푹 쉬고 돌아온 서연의 정신과에는 여전히 점심 · 저녁 식사시간을 제외한 병원 영업시간 내내 끊이지 않고 환자들이 내원 예정이었다. 내원 환자들은 그야말로 가지각색,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유명 인들도 존재했다. 오늘 특히 신경 쓸 환자인 인기 트로트 가수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가 연 정신의학과 오래된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 트로트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가 왜 여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모며, 재력이며,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그녀가 왜 정신과 환자가 되어 여길 드나든단 말인가?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녀의 지방 투어 일정이 3주로 정해져 있는 것도 병원과 관련되어 있다. 처방받는 약 중에 3주 치 이상을 받을 수 없는 약이 있어서 서울에 무조건 3주 안에는 한번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3주에 한 번 병원 오픈 타임에 예약해서 머리끝까지 발끝까지 가리고 매니저와 함께 와 빠르게 진료를 보고 3주 치 약을 받아 다른 환자들이 오기 전에 사라지곤 한다.
“지난 진료 이후 3주간 좀 어떠셨어요?”
말갛게 웃으며 오랜 환자를 맞이한 수하의 질문에,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진료실 책상 위에 고이 올려놓고 화사하게 입꼬리를 접으며 트로트의 여왕 홍윤영은 말문을 틔웠다.
“여전하죠 뭐, 차 멈춰 서면 무대 올라서 노래하고, 끝나면 차 타고 또 차 서면 또 노래하고 끝나고 또 차 타고... 반복인 일상. 사실 이렇게 병원 3주에 한 번 오는 거 아니면 몇 달에 한 번 서울 올까 말까 할 텐데... 사실... 병원 핑계로 서울 와서 집에서 하루 이틀 쉬고 다시 돌아다니는 거 좋아요.”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그렇듯, 아니 그녀는 그보다 더 빡빡한 스케줄로 지방 행사를 돌아다니곤 했다. 서연은 초진 때 처음 그녀와 마주 앉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숨이 ‘콱!’ 하고 막히는 기분. 무릎을 감싸 안고 쪼그려 앉아있을 만한 공간만 있는 검은 상자 속에 갇혀있는 기분. 그리고 폐소 공포증 같은 것과 같은 공포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과거와 비교했을 때 그녀는 무척 많이 좋아진 환자 중 하나다. 내원한 지 1년 정도가 지나자 상태가 안정적으로 변했고, 6개월이 더 지난 지금은 복용하고 있는 약물을 조금씩 줄여가고 있었다.
“기획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제일 무서운 게 무대에서 갑자기 발작 와서 무대에서 쓰러지거나 과호흡이 와서 문제 생길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니까... 무리해서 스케줄 안 잡고, 저도 힘들면 힘들다고 회사에 얘기해요. 어쨌든 제가 무대에 서야 회사도 저도 서로서로 윈윈이니까. 그리고 일단 병원 다니는 것 알려지는 것도 무섭기도 하고.”
“그런 일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일부러 홍윤영님 진료시간 앞 뒤 30분은 늘 비워두는 거 처음 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예외 없이 지켜지고 있는데.”
“원장님을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기자들을 못 믿겠어서 그러죠. 이상한 찌라시 기사로 호시탐탐 나 긁으려고 하는 게 보이니까. 아시면서...?”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호 웃는 윤영의 눈엔 장난기 어린 눈웃음이 걸려있었다. 그 눈웃음에 무안해진 서연은 잠시 마른세수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또 말렸다.
“원장님 같은 방법으로 놀리는데 매번 어쩜 이렇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세요 호호호. 이럴 때 보면 원장님 참 귀여우시다니깐...!”
“홍윤영님 그만하세요... 매번 그러시면서도 아직도 재미있으세요?”
“그럼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철벽을 치고 있는 얼음공주 원장님인데요. 그렇게 놀릴 때 당황스러워하며 빈틈 보이는 게 그게 원장님 매력이라니깐요. 매번 말씀드리지만 진짜로 귀. 여. 우. 세. 요.”
서연이 느끼기에도 자신을 놀리는 윤영의 말에 가시가 있거나 빈정거리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호의. 그리고 친근감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인간 대 인간의 호의 그 자체였다.
“약은 어떻게 지금 상태 유지할까요? 저번에 바꿔 가신 약 부작용 같은 건 없으셨나요?”
무안해진 서연은 대화의 주제를 돌려 원래의 목적인 진료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번에 바꾼 아침 우울증이랑 불안증 약은 따로 부작용이랄 것 없었고, 근데 조금 아쉽긴 하더라고요. 전보다 용량이 줄어서 그런지. 그럴 때마다 필요 시약 먹어서 보충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증량하고 싶진 않아요.”
“저녁에 드시는 수면 관련된 약은요?”
“지금이 딱 좋아요. 계절 바뀌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지금은 필요한 만큼 푹 자고 자고 나서 개운한 것까지 만족스러우니까요.”
“그러면 이번에도 3주 치 처방해 드리면 되겠죠?”
“그럼요. 늘 감사해요 원장님.”
3주 만에 돌아온 트로트의 여왕 홍윤영의 진료는 이렇게 순조롭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