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 에세이집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를 읽고
시인들이 쓴 에세이집을 좋아한다. 산문임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감각을 짧은 단어 속에 꾹꾹 눌러 담던 사람들의 습관이 배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를 타선’이 없다는 거다. 독서를 하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밑줄을 긋는 습관이 있는데 언젠가 어느 시인의 에세이를 읽을 때는 한 페이지 전부를 색칠해야 했다.
어떤 시인들은 에세이를 통해 개인사를 드러내기도 하고 사회 문제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보편적인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을 읊조리기도 하고. 그래서 때로는 기사를 다 쓴 기자가 미처 기사에 담지 못한 내용을 별도의 지면에 쓰듯이 시인들도 시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산문의 형태를 빌려서 쓰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에세이집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는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등을 쓴 박연준 시인의 에세이집이다. 박연준 시인은 앞서 출간된 에세이집 <소란>,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로 유명하다. 나 또한 시집보다는 에세이집에 좀 더 익숙하다. ‘사랑의 실패’라는 주제에 대해 <소란>처럼 정직하고 정확한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는 시인이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써 내려 간 글이다. 독특한 화풍과 다양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프리카 칼로의 생애 가운데 시인은 프리다 칼로의 사랑과 고통에 집중한다.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평생의 수술로 신체적 고통을,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모두 겪어야 했다.
두 가지 고통 모두 프리다 칼로에게 치명적이었고 시인이 보기에 프리다 칼로는 이 모든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불치병을 앓는 자가 올리는 기도이자 제사’였고 ‘절박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아직도 움직인다.’ (그렇다고 디에고 리베라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성에게 ‘사랑’이라는 단 한 가지 종류의 열정만이 허락되어 왔으며 그게 억압이었다는 얘기를 당연하지만 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자 동시에 아쉬운 점은 대부분 글이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서 시작해 나무가 가지를 뻗듯 활기차게 뻗어간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거의 담겨있지 않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 친절히 전달하고 있지도 않다. 시인은 오히려 프리다 칼로의 그림에서 촉발된 생각의 조각, 과거 불안정했던 날들, 사랑에 대한 질문과 시인의 대답을 더 많이 풀어낸다.
때문에 ‘화가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시인이 서론에 정직하게 고백했듯이 이 책은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는 개인의 독백에 가까운 글’이기 때문이다. 시인만의 관점으로 풀어낸 작품 해석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모호한 책이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가 그림을 그렸을 당시 느꼈을 고통과 사랑이 오늘날에도 어떤 식으로 유효한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이를 테면, 프리다 칼로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게 만드는 다리 같은 책이다. “난 내 살갗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라고 말한 사람.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했지만 “만약 나에게 건강이 있다면 그에게 모두 주고 싶다”라고 말한 사람. 죽음을 앞두고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한 사람.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