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싱크대로 가자마자 진한 악취를 맡았다. 억울했다. 힘들지만 모든 끼니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를 하려고 노력하고, 자기 전에는 당연히 그날의 설거지를 마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런 냄새를 맡아야 하다니.
일단, 음식물 쓰레기를 먼저 꽁꽁 묶어서 버렸다. 아침에 나가면서 버리려고 어젯밤에도 닫아두었지만 다른 비닐에 넣은 후, 식빵 묶는 금색 철사 끈으로 꽁꽁 묶어서 현관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코를 킁킁대도 여전히 냄새가 났다. 고무장갑을 끼고 장갑에 세제를 칠한 후 거름망을 버리고, 배수구를 씻었다. 싱크대 전체를 다 세제로 문질러도 냄새가 나니 울고 싶었다.
싱크대 한쪽에 세워둔 지퍼백들이 보였다.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음식을 비우고 남은 지퍼백들이 쌓여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넣어두면 일반 비닐보다 꽉 닫히는 게 편해서 나중에 쓰려고 싱크대 한쪽에 세워두었는데 거기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투명해 보이는데, 스쳐 지나간 음식의 기운도 상해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세개의 지퍼백 중 정확히 하나에서 그 진한 악취가 났다. 종량제 봉지 안에 넣고 냄새가 없어지라고 주문을 외우듯 분쇄된 원두찌꺼기를 뿌리고 쓰레기통을 닫았다. 기진맥진해서 두유 한잔과 토마토만 먹고 집을 나섰지만, 출근시간은 예상보다 30분 늦어있었다.
나는 사 면 중 하나 완전히 유리로 되어 있어 열기만 하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일반 아파트에 사는 것이 아니다. 올해 이 집에 들어왔기에 이제 안 사실이지만, 여름엔 엄청 덥다. 환기가 어렵고 푹푹 찌는 집안에서는 음식의 기운조차도 자고 일어나면 강한 악취를 풍긴다. 싱크대를 흘러간 음식의 기운(쉽게 말해 국물들)이 제발 다시 올라오지 말라고 수돗물을 흘려보내며 낭비할 때도 있다.
오늘 출근하면서 생각했다,
'잠시 요리를 쉬어야 하지 않을까.'
더위 때문에 불 앞에 서기도 싫고, 상하는 음식 처리와 싱크대 관리에도 지쳤다. 사실 자취 초반의 파이팅도 사그라들었다. 처음 입주해서는 가스 검침 앱을 깔고 직접 기록하며 포인트도 받았는데, 오늘 가스 자가검침 등록이 3개월간 미입력되어 검침을 나올 거라는 문자메시지도 받았다. 시시한 가스 검침도 이제 안 하는데 설거지라는 노동을 동반하는 고통을 이어갈 수 있을까.
요리를 안하고도 잘 사는 자취 친구들 모델을 다시 한번생각해보게 된다. 1번 다 배달시켜먹는 건 역시 나랑 맞지 않고(맥도널드 버거는 먹고 싶을 때가 없고, 오늘의 회는 어느 좋은 날 시켜볼 것 같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시키기엔 비싸고 이삭토스트 정도는 만들어 먹기 어렵지 않잖아!), 내가 갈 길은 재료 그대로 먹는 2번 친구의 길 같다. 대신, 좀 더 그 재료가 건강해지겠지. 구운 계란을 시켜먹는 대신 계란은 아마 직접 삶아먹을 테고, 닭가슴살을 사두는 건 비슷해질 것 같다.
2번 재료만 먹는 친구는 정말 절대로 요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다 더 환기가 어려운 오피스텔에 살지만, 나처럼 예상 못할 냄새에 부딪칠 일이 절대 없다. 종량제 쓰레기 빼고는 나오지 않는 상태의 음식만 먹으니, 싱크대가 더러워질 일도 없다. 이 친구는 혹시 컵라면이라도 먹게 되면, 국물을 다 마셔버린다고 한다. 싱크대 배수구로 그 빨간 기름이 지나가면서 더럽힌다는 걸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란다. 절대 요리가 가져오는 더러움을 감당할 수 없는친구다.
나도 이 친구처럼 더운 여름만이라도 요리를 쉬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난, 채소를 안 먹고는 못 살 것 같다. 친구는 최대한 쓰레기가 안 나오고 씻기 어렵지 않은 과일들(체리, 방울토마토 같은)을 사서 먹지만, 난 그걸로 안된다. 양파, 당근, 가지, 오이, 토마토가 없으면 떨어지자마자 불안해진다.
그런데 채소는 그 자체가 노동이다. 시장에서 특히 싸니까 두 팔 가득 지고 오면 체력 없는 나는 몸살부터 난다. 여름엔 조금 비싸더라도 새벽 배송을 이용하긴 하지만, 먹기 전 감당해야 하는 노동도 한가득이다. 야채에 따라 껍질을 벗겨야 하고, 이때 친구 2번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 쓰레기도 나오고, 베이킹소다를 푼 물에 담가서 표면을 씻어야 하고, 귀찮아서 미리 씻어두면 무르거나시들시들해진다. 그런데도, 야채를 먹고 싶다. 깨끗이 씻고 꼭지를 따고 껍질을 벗기고 때로는 기름에 볶아서, 야채를 잔뜩 먹으면서 살고 싶다. 심지어 여름엔 야채가 더 건강하고 가격도 저렴하단 말이다!
요리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의지는 바닥났을 때면, 늘 다시 들여다보는 만화가 있다.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다. 게이 커플의 저녁식사 준비가 대부분의 소재이고, 그들 주변 사람들, 가족이나 이웃, 직장동료들의 요리 이야기도 등장한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변호사와 미용사 커플의 저녁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
E북으로 사서 표지는 포탈사이트에서 다운받았는데 어째 흐릿하다
변호사 시로는 중년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고, 한 달 식비 둘 합해 3만 엔만으로도 미식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채우고 있다. 비결은 직접 만드는 저녁식사인데 고기나 생선을 담은 메인 디시 외에도 야채 절임이나 볶음, 샐러드, 국까지 4개 이상의 제철 음식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맛있으면서도 꼭 야채가 빠지지 않는 식단이 약해가는 내 안의 요리 의지를 살린다고나 할까.
깍지콩이나 대파가 아니면 냉동에 넣어두기 어렵다 보니, 냉장고 안에서 채소는 금방 물러버린다. 그럴 때면 나는 휴대폰 안에 넣어둔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를 보며 다시 의욕을 다지고 갑자기 밤에 일어나 살금살금 요리를 한다. 망원시장에서 500원이래서 사 왔지만 생으로 먹기는 허름해 보이는 파프리카를 썰어서 가지도 넣고 된장볶음도 만들고, 너무 딱딱해서 썰리지 않는 단호박을 생전 처음 분해해서 단호박닭고기 조림을 한다.
닭고기 단호박 조림. 만화책에서는 닭다리가 들어갔는데 닭가슴살밖에 없어서 대체해도 맛있었다. 일본식 국수장국으로 졸여야해서 메밀살때 받은 다시간장 2인용 팩을 썼다.
한밤중에 만화를 보다 일어나서 만든 가지피망된장볶음. 나는 피망 대신 처치곤란인 파프리카를 사용했다.
뭐, 좀 더 나가면 그린카레를 해먹고 싶어서 쿠팡에서 그린커리 페이스트, 코코넛밀크를 주문하고 월계수잎, 치킨스톡, 라유 같은 고급 식재료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새벽 배송에서 찾을 수 없는 식재료 때문에 요새 뜸했던 쿠팡도 다시 들어가게 만드는 대단한 만화다.
무엇보다 이 만화는 요리가 주는 긴장과 보람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장을 보면서도 더 싼 것, 지금이라서 싼 것을 찾고 냉장고 속 있는 재료와 합을 맞추느라 계속 머리를 굴리고, 익는 순서와 설거지를 고려해서 요리를 하고, 마지막엔 맛있다고 칭찬해주며 사이좋게 먹는 커플의 모습까지 요리가 줄 수 있는 수고와 기쁨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듯하다.
어제 쿠팡에서 주문한 그린커리 페이스트와 코코넛 밀크가 오면 냉장고 속 야채들을 듬뿍 넣어서 주말엔 뜨거운 카레를 해먹을 거다. 더위에도 굴하지 않고, 싱크대 냄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만든 요리를 스스로 칭찬해주며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