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다해먹고 사는 몇 안되는 동료라서 같이 점심을 먹고 나면 요리 얘길 자주 하는데, -첫 편에서 얘기한 4번, 스스로를 위해 한 상 차리는 친구다- 갑자기 카레 얘기가 나왔다.
"카레가 자취생의 친구잖아. 재료 넣고 뚝딱 하기도 편하고 다 좋은데, 이제 확 질리네."
이 친구의 카레 만드는 방식은 나와 다르다. 감자를 넣지 않고, 양파를 캐러멜색이 날 때까지 달달 볶은 후에 일본식, 갈색 빛이 도는 카레소스를 넣는다. 보통 갈색의 정사각형 고형분을 사용하는데, 노란색 카레가루보다 풍미가 깊은 편이다. 여기에 그때그때 닭고기나 소고기, 새우 등 원하는 재료를 바꿔가며 먹는 것 같은데 그래도 질린다니, 역시 미식가라 그런가 하고 묘하게 납득했다.
옆에 앉은 다른 동료 -첫 편에서 얘기한 3번, 간편하고 저렴한 한식 위주-에게 물었더니, 독립한지 10년이 되도록 카레에는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주에도 오뚜기 3분카레 10개들이를 싸게 주문해서 하나씩 꺼내먹고 있다고 했다.
역시, 혼자 산다고 해도 먹고 사는 모습은 천차만별이어서 둘의 얘기 다 공감이 가지 않았다. 뭐, 둘도 나에 대해 마찬가지겠지만.
일단, 난 아직 카레에 질리지 않았다. 4번 미식가 친구는 코로나 시작과 함께 독립해 1년 6개월 카레를 먹었고, 나는 아직 독립 6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물리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1년 6개월이 지나도 물리지 않을 자신 있다.
또, 저렴한식 친구와 달리 나는 3분 카레는 잘 못먹는다. 카레뿐 아니라 햇반, 즉석국 등의 레토르트에 민감해서 친구들이랑 여행 가서 한 끼는 먹을 수 있지만 일상에 두진 못한다. 냉동식품이나 동결건조 식품과는 달리, 레토르트 특유의 화학적 냄새를 잘 못견딘다. 사실 이 사실도 독립하고 햇반과 육개장을 사먹고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고작 삼분카레와 다름없게 생긴 집 카레를 한 시간을 꼬박 들여 만든다. 간이 약하고 야채와 고기가 잔뜩 든 거 빼고는 색이나 모양새는 3분 카레와 똑같다.
확실히 카레는 자취생의 친구다. 한 번에 많이 해서 얼려두고, 요리하기 힘들때마다 꺼내 먹으면 된다. 고기와 야채가 모두 들어가 있어서 반찬을 열심히 챙길 필요도 없고, 강한 향신료 덕에 없던 입맛도 돌아와 좀비처럼 그릇을 비우게 만든다.
독립해서 처음 이 집에 입주하고 시도한 첫번째 요리도 카레였다. 가구도 들이지 않고 무작정 입주하면서 식빵과 양배추, 마요네즈, 귀리우유를 사서 들어왔다. 아직 냉장고도 들어오지 않아서 베란다에 음식물을 일렬로 세워뒀다.
그 다음엔 슈퍼에 가서, 부엌등에 꽂을 전구를 고르고, 정수기를 들이기 전 수돗물을 끓여먹기 위한 보리차 팩을 사왔다. 드라이버가 없인 청소기도 못쓴다는 걸 알고 공구상자는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그러고 나니 허기가 져서, 양배추 샐러드를 식빵에 얹어서 씹고, 귀리 우유로 넘겼다. 배가 좀 차자, 다음 끼니를 위해서 요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슈퍼에 가서 양파, 감자, 당근, 돼지고기, 카레가루를 사서 올라왔다.
온갖 야채를 깎아서 깍둑썰기 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양파 빼고는 썰기도 힘들었다. 구도에 가까운 노동 후 만들어낸 카레가 너무 만족스러워 주변에 자랑했던 게 기억난다. 당근이 너무 많아서 그냥 많이 넣었는데, 남이 내주었다면 '뭐야, 당근만 많아'라며 불평했겠지만 요리의 히스토리를 아는 내가 먹으니 당근맛 강한 매력적인 카레였다.
평가를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서 맛보는 행위 자체의 쾌감에 엄청 흐뭇해했던 것 같다. '당근이 많은 카레, 너무 좋아!'라고 속으로 외치고, 발을 구르며 먹었다. 절실하게 혼자 있고 싶은 나머지, 몸부터 먼저 들어와 식탁과 냉장고를 기다리면서 만들어둔 첫 요리였다.
그 후 2주에 한 번은 카레를 만들었다. 늦은 퇴근 후 최대한 소리가 작게 나도록 야채를 천천히썰어 카레를 만들어 밤 사이 베란다에서 김을 빼고 아침에 소분해서 냉동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요리하기 힘든 저녁이면, 냉동에서 한 팩씩 꺼내서 먹었다. 나중엔 같은 재료에 호박을 추가해서 만든 짜장도 옆에 얼려두었다.
카레에 물려서 뭐라도 얹어보던 때엔 냉장고도 들어와서 본가에서 김치도 공수해왔다
사실, 카레를 꺼내는 빈도가 점점 낮아져서 이젠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만드는 것 같다. 대신, 카레에 더할 수 있는 추가 메뉴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카레 위에 얹을게 없는지 찾는다. 만만한건 자루로 사둔 냉동 소시지다. 가지나 깍지콩, 브로콜리 같은 게 있으면 따로 2분만 볶아서 넣는다. 그것도 귀찮으면 그 야채들과 소시지를 한꺼번에 카레에 넣고 데운다. 확실히 '집밥 냄새나는 오뚜기 카레'에는 나도 물려가나 보다.
그러다 어느 날, 카레 위에 사워크림을 올려보고 너무 맛있어서 혼자 또 발을 구르며 먹었다. (어린아이들이 맛있는 거 먹을 때 발을 흔들듯이, 혼자 먹을 땐 맛있다는 표현을 발로 해준다). 화이타를 먹으려고 토르티야와 함께 산 사워크림은 카레와 잘 맞았다. 사워크림 효과로 카레를 6~7끼 비운 것 같다.
사워크림은 늘 구비하고 있기 부담스러운 재료라, 얼른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요거트와 달리 500그램 정도 통으로 살수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한 통을 비우려면 10끼 정도를 먹어야 하다보니 끼니때마다 의무감을 느껴서 나중엔 사워크림 때문에 카레에 질렸다.
그래서 한 동안 카레를 쉬다가, 일본 만화책을 보던 중 드라이카레를 알게 됐다. 다진 고기와 야채를 볶으면서 카레가루를 넣는 방식인데, 카레가루를 물에 풀지 않는 방식이 신선했다. 물론 퍽퍽해서 계란 프라이를 두 개나 해서 얹어서 비벼 먹었지만, 진한 카레향은 일품이었다.
드라이카레는 풍미가 강해서 사워크림과 더 잘어울린다
내가 카레에 물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는 건, 계속해서 새로운 카레를 시도하고 도전하기 때문도 있지만, 소분해서 냉동해 두기 때문에 한 끼 먹고 나면 절대 이어서 먹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먹고 싶을 때만 꺼내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 냉동실에 들어갔으니 유통기한은 영원(?)이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분명 먹고 싶어 질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저 힘든 날 한끼는 분명 저기 있다고 든든해하면 될 일이다.
4번 미식가 친구는 요리를 냉동하지 않는 주의다 보니 1인분만 하기 어려운 카레는 끼니를 이어서 먹는 경우가 더 많아서 더 쉽게 질리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미각인데 얼마나 질리겠어? 제발 요리 좀 냉동하라"라고 설득하지만 절대 듣지 않는다. 그때그때 바로 해먹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기 위한 룰은 이렇게나 천차만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