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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l 07. 2021

혼자 다 해먹고 살 수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 스스로를 위한 밥상/술상 차리기

"부모님 집은 네가 물려받아야겠다고 남편이 그러더라."

유학과 결혼으로 일찍 부모 곁을 떠난 언니들과 달리, 오랜 세월을 부모님과 함께 살다 보니 이런 소리도 듣게 되나 싶었다. 부모님을 모신다는 개념은 내 안에 절대 없었다. 부모와 산다고 해서 딱히 불편할 게 없었다.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독립하질 못하고 계속 같이 늙어간 것뿐이다.

사실 그게 가능했던 건, 내가 집에만 붙어있는 부모님과 달리, 집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집과 회사가 편도 80분 이상 걸리다 보니 평일에 집에서 저녁을 먹을 일도 거의 없었다. 보통은 한 시간쯤 더 야근을 하고 회사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야근이 싫으면 지하철에서 내려 떡뽂이, 육쌈냉면, 짬뽕 같은 걸 환승시간 안에 먹어치우고 다시 버스에 올라 소화를 시킨 뒤 집에 가서 눕는 데 익숙했다.

평일엔 야근에 치여 사는 대신, 주말엔 친구를 만나 주중에 채우지 못한 식탐과 수다를 채웠다. 집은 밤에 머리를 누이는 공간일 뿐이었다. 주중 야근과 주말 술자리의 루틴을 지키는 동안 삶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직급이 오르고, 연봉도 오르고, 선남과의 연애 실패담이 쌓여가는 것도 그 루틴 안에서 지층처럼 쌓이는 변화였지 일상은 그대로였다.

그런 평온한 일상이 갑자기 깨진 건 코로나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재택근무를 하기에, 부모와 사는 집은 턱없이 좁았다. 야근과 철야는 해도 집에 일을 들고 오지 않았기에, 내 방을 작업실로 쓴다는 생각도 못했다. 옷방으로나 쓸 법한 작은 공간에,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책상은 고등학생 이후 쓴 적이 없어 또 다른 책장으로만 기능하고 있었다.

거실로 나와 식탁에 앉아서 일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지만, 퇴직한 지 오래된 부모의 공간을 침범해야 했다. 가끔은 일에 집중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식탁을 차지했는데, 노인의 한가로운 일상에 끼어드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TV를 틀지 못하는 아빠와 조용히 소리 죽여서 야채를 써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건, 나에게 '비참한 감정'까지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재택근무는 방안에 작은 상을 펴고 그 위에 거대한 랩탑을 올려둔 채 이루어졌다. 등을 굽히고 작은 방에 갇혀있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게 더욱 난감했다. 근무를 하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해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으면 면구스러운 건 둘째치고 입맛에 안 맞았다.

나만의 공간이라는 게, 이렇게 절실한 것인지 팬데믹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지켜왔던 루틴이 모두 파괴되자, 공간에 대한 내 욕망은 점점 구체화되고 절실해졌다.

커다란 식탁과 커다란 냉장고, 두 개가 너무 가지고 싶었다.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커다란 책상 또는 식탁이 필요했고, 커피나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바로 만들 수 있는 근접한 주방도 필요했다. 재택근무 동안 먹을 식사를 전날 준비해서 넣어둘 수 있는 나만의 냉장고를 가지고 싶었고, 일찍 닫는 술집 대신 친구와 맘 편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이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식탁과 냉장고 둘 다 필요했다.

여러 명이 한 집에 버젓이 산다. 많은 가족이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식탁과 냉장고에는 보통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은 그 집안의 주부다. 엄마에게 평생 속해있던 냉장고와 식탁에 내가 이렇게 샘을 내게 될 줄은 평생 몰랐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코로나 이후 6개월을 견딘 후 그해 여름부터 독립을 준비해, 결국 2021년 1월부터 혼자 살게 되었다.



"전기밥솥 사지 마, 괜히 공간만 차지한다. 어차피 햇반만 먹을걸."

"혼자 살면 다 갈아먹는 게 편해, 믹서기는 꼭 사라."

"화력이 그렇게 중요한가? 요리도 별로 안 할 텐데 인덕션이 깔끔해."

혼자 살아본 적이 없으니, 부모와 친구, 형제에게서 갖은 충고가 떨어졌다. 나 역시 내가 어떻게 사는 걸 편해할지 모르니 이런저런 충고마다 또 흔들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내가 모르니, 무언가를 사는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혼자 사는 친구들이 사는 모습은 천차만별이었다.  건강과 영양을 신경 써서 메뉴를 고르는지, 어느 정도의 지출을 각오하는지, 미식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주변 친구들을 등급 매겨 보았다. 이중 미식이라는 건 다소 주관적인 부분이 있다. 먹고 싶은  욕망 그 자체에 충실한 정도를 내 나름대로 판단했는데, 사실 나머지도 내 맘대로 판단한 건 마찬가지다.


1. 배달에 의존하는 친구(건강과 영양 3, 미식 8, 경제적 지출 10): 아침에 일어나면 이삭토스트나 맥모닝을 주문하고, 주말 점심엔 피자를 주문하고 친구들이 오면 마켓 컬리에서 주문한 미미네 떡볶이를 끓여주거나 같이 주문한 샌드위치를 내준다.

2. 재료만 먹는 친구 (건강과 영양 5, 미식 2, 경제적 지출 5): 단백질 빵, 그릭 요구르트, 닭가슴살, 시판 샐러드를 주로 먹는다.  가끔 냉동도시락도 먹는다. 그러다 식욕이 폭발하면 1번 친구처럼 맥도널드나 버거킹, 치킨, 엽떡을 배달한다.

3. 한식에 익숙하며, 배만 채우면 되는 친구(건강과 영양 3, 미식 3, 경제적 지출 3): 오뚜기 3분 카레와 사골곰탕과 김밥천국을 오가지만 가끔 김치찌개, 꽁치찌개를 해먹는다.

4. 요리블로거 수준으로 해먹는 친구(건강과 영양 10, 미식 10, 경제적 지출 10): 신선한 채소와 질좋은 고기, 브리타 치즈같은 비싼 재료를 아끼지 않고 자신의 식사에 쏟아붓는다. 밥에도 고구마나 톳을 넣어서 그때그때 해먹고 국과 고기, 생선 반찬, 샐러드까지 꽉꽉 채워서 한 상 차린다.


1번은 절대 내가 선택할 옵션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시켜 먹는 음식 중 치킨 빼고는 줘도 먹기 싫은게 많았다. 치킨도 로메인, 토마토를 곁들어야 먹을만했다. 꼭 시키자면 중국집은 진진 정도는 시켜줘야 했고, 샌드위치면 소금집 정도는 돼야 먹을만 했다. 매일 먹는 식사로는 비싼 가격이니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4번 한상차림러 따라갈 엄두는 안났다. 끼니마다 소고기를 굽거나 브리타 치즈를 꺼내서 단백질을 보충하고 데일리 와인으로도 삼만원대를 고를 수는 없었다. 물론 나 역시 끼니마다 고기와 채소를 강박적으로 찾고, 인슐린에 영향을 미친다는 GI지수도 찾아보긴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와 환경보호 때문에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를 찾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달 15만원의 식비를 넘지 않는 기준을 지키고 싶었다. (술까지 합한 비용은 절대 아니다. 친구들과 위스키라도 비우는 달엔 술값이 식비를 뛰어넘는다.)


독립 6개월이 지난 지금, 내 스스로의 등급도 매겨 보면 건강과 영양은 10, 지출수준은  4점 정도라고 가늠해본다. 이제 원하는 건 모두 만들어먹는다. 재택과 주말까지 합하면 일주일에 4일은 세끼 다 집에서 해결한다. 주말엔 술집에 가는 대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식사마다 고기와 야채를 꼭 챙긴다. 밀키트, 라면, 치킨을 한두 번 시도했지만 직접 해먹는 게 더 건강에 좋거나 맛있거나 경제적이거나 쓰레기가 덜 나왔다. 그래서 최근 삼개월동안은 밀키트도, 배달음식도, 라면도 없었다.

거의 주말에 요리해서 주중엔 빼먹기만 하는 수준인데도, 늘 요리에 드는 시간은 부담스럽다.  하루 평균 1~2시간, 주말 동안은 평균 6시간은 청소, 빨래, 정리까지 해야 하니, 요리라도 안해야 할까 문득문득 생각한다. 필수적인 집안일에 비하면 요리는 유일하게 선택 가능히다. 게다가, 요리를 안하면 장보기, 설거지, 음식물쓰레기버리기도 같이 줄어들 것 아닌가.

그럼에도 여전히 장볼 메뉴를 고민하고, 건강하고 영양가 높고 경제적인 식단을 생각하고,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내놓기 좋은 색감 좋은 요리의 조합을 생각하게 되는건,  이게 혼자 사는 내 일상을 지켜주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팬데믹 후 혼자 일하고 혼자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외롭고 무기력해질 수도 있는 삶을 그나마 건강한 루틴 속에 흘러가게 해준다. 6개월 만에 완전히 변한 내 일상이 때로는 신기하고, 자주 버겁고, 대충은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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