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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H Sep 17. 2023

05. 이런 적 처음이야

아빠는 좋겠다. 매번 모든 것이 새로우니까.

우리 집 어르신이 69세 혹은 70세가 되던 해부터 그랬나?


무슨 일이든 '이런 적 처음이야'라는 소리를 많이 하신다. 


'와, 여기가 이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이야.'


'이야, 이걸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적은 처음이야.'


웬만한 일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새롭다는 듯이 말하지만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때 겪은 일들이 결코 처음이 아니다. 


똑같거나 비슷한 일들을 작년에도, 그 전년도에도 분명히 겪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나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아플 때 이런 멘트를 많이 하신다. 


언젠가 새살이 차오를 가벼운 외상을 입은 경우에는 매우 쿨한 편이다. 이건 아빠 본인 스스로 어릴 적부터 많이 경험해 봐서 처음 겪는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내과적으로 아픈 일에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된다.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고갈돼서 기운 차리지 못하거나 처방받은 약을 먹고 괜찮아질 때가 됐는데도 호전이 안되면 안절부절못한다.


"와... 이렇게 아파보기는 처음이네."


"뭐? 처음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말 저번에도 똑같이 했어."


"내가? 아냐.(굉장히 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아무리 늙었어도 그 정도도 기억 못 할까 봐." 


"아잇! 진짜 아빠 저번에도 똑같이 말했다니까?"


"어이구 참, 진짜 이번에 이러는 거 처음이라니까. 넌 사람을 뭘로 보고... 처음 겪는 일 맞아."


"정말 답답하다. 아빠가 이럴 때마다 트루먼 쇼처럼 여기저기 관찰 카메라 달고 사실 여부에 대한 시비가 있을 때마다 비디오 판독하고 싶을 정도야.'


"야, 내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 겪으면서 말하는 건데... 내가 더 잘 알지. 네가 더 잘 알겠냐? 처음 맞다고!"


"그래, 삶은 아빠처럼 살아야 해. 매번 똑같이 겪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빠처럼 새롭고 처음 같으면 얼마나 좋아. 나도 매번 같은 일을 겪을 때마다 새롭고 신기해했으면 좋겠다! 사람이 세상 순수해 보이게!"


"(앞에 내 말 무시) 진짜... 이러는 거 처음 맞아. 와... 예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제는 너무 힘드네."


대화가 도돌이표가 되니 나도 사실에 대한 반박보다 아빠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비꼬는 일이 많아졌다. 


아빠가 69세, 70세가 되던 해에는 걱정 한가득 담아 보건소라도 가서 어르신 상담 좀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겉으로는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본인 스스로도 걱정 한아름 안고 상담을 받아봤다. 물론 치료 목적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는 상담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노환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와 판단력과 이해력이 느려졌을 뿐 오늘 먹은 것과 방금 눈으로 본 단어를 금방 까먹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아빠의 기억력과 비례하게 나의 마음씨도 점점 고약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내가 점점 더 고약해지는 부분을 손꼽으라면 바로 이 부분이다.


아빠가 비교적 젊었던 시절에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에 가서 뭘 먹었는지 기억을 잘하시는 편이다.


'너는 어릴 때라 기억 못 하려나? 그때 거기 도로가 없는 곳이어서 산 넘어서 겨우 먹으러 갔었어.'라던가


'내가 어릴 적에 먹었던 그 음식은 진짜 고소하고 맛있었어.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라면서 매번 말씀하신다.


지금도 과거 추억팔이 얘기를 할 때면 마치 몇 초 전에 겪은 것처럼 생생하다 못해 랩 하듯 줄줄이 읊을 정도다. 


하지만 나름 기분 좋게 추억팔이를 하다가도 갑자기 나는 기분이 언짢아진다. 


'젊었을 때 먹었던 일은 이렇게 기억을 잘하면서 왜 가족끼리 겪었던 일들은 매번 모르쇠로 일관하지?'


초반에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 기억 못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 기억해 주고 이해해 주는 츤데레 스타일의 아빠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겉차속따 콘셉트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여러 방면으로 무신경하고 본인 기억하고 싶은 것만 미화시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도 부모로서 언니와 나의 성장과정 속에 속해있고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몇 개 없다. 


내가 뭐 때문에 힘들어했었는지, 그리고 내가 뭐에 관심이 많았고 뭐를 가장 하고 싶어 했는지는 아빠의 기억 속에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니, 어쩌면 아빠의 기억 속에 몇 초 스쳐 지나간 단순 해프닝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런 아빠의 기억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아빠가 환갑을 넘겼을 무렵부터 과거에 우리 가족 혹은 현재 사회적 이슈를 꺼내면서 내가 겪은 비슷한 경험들을 말해줬다.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줬기 때문에 듣기 지겨워서 그만 얘기하라는 말이 나와야만 했다. 


"몰라. 기억 안 나."


대부분 아빠의 대답은 이렇다. 


아빠는 그저 내가 쓸데없이 말이 많고 미간에 주름잡고 늙은 애비한테 잔소리만 하는 딸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식탁 앞에 앉아서 입만 털면서 과거의 일을 기억 못 한다면서 늙은 아빠 혼구녕만 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노력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아빠와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발버둥 치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내가 주기적으로 하나의 추억을 반복해서 얘기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어쩔 때는 기적적으로 '그거 네가 저번에 얘기했었잖아'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열심히 듣는다. 


아니...


계속 기억해 줄 것처럼 열심히 듣는 척만 하고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미간에 주름을 잡아놓은 상태로 멍 때리고 있던 게 확실하다.


이전에도 기억하고 싶은 소량의 기억만 간직하며 사는 분이셨지만...


아빠는 해를 거듭할수록 꺼져가는 기억력 때문인지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을 보인다.


그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있고, 아빠도 이제 70대 중반을 달려가고 있는데 기억 못 하는 게 많겠지...


본인과 관련된 좋은 일만 기억해도 버거울 텐데 구태여 자녀의 슬프고 억울했던 과거를 기억에 담아두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어봤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아빠가 내 말에 고민할 생각도 없이


"몰라. 기억 안 나."라고 대답해 버리면


히스테리를 부리듯 일상에서 욱- 하고 올라올 때가 많다.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나의 표현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되짚어 보며 방법을 조금씩 바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고민한 보람이 단 1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과 더불어 전혀 내 말의 맥락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적어도 지난달에 동태탕을 먹고 내가 

"여기 동태탕은 새우젓을 많이 넣어서 감칠맛은 좋은데 간이 많이 센 편이야. 그래서 잠들기 전까지 물을 많이 마시게 돼. 아빠가 동태탕을 꼭 먹고 싶거든 이전에 포장해서 먹었던 다른 가게에서 사 왔으면 좋겠어."라고 설명해 주면 


"응, 알겠어."라고 대답은 잘한다.


그러나 약 한 달 뒤 아빠는 기어코 '먹고 싶다.'라는 욕구에만 충실한 나머지 내가 했던 말은 깡그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그러고선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온 동태탕 국물 속에서 넘실넘실 춤추고 있는 새우젓을 보면서 놀란다.


"와! 진짜네? 새우젓 천지네?"


이번에는 아빠 본인이 직접 새우젓이 많이 들어갔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다음에 동태탕을 먹고 싶을 때 고려를 하겠지...라는 기대를 해보지만...


'역시나 아빠가 아빠 했다.'라는 말 할 확률이 더 높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이지만 내가 기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늘 새롭고 처음 같은 느낌으로...


나도 속 편하게 아빠처럼 정신 개조를 해서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새로운 척 연기하며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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