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에 대하여
프로이트가 가장 연구를 잘 해놓고 간 증상은 강박증입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처음에 연구하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지만 이후 강박증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프로이트의 ‘쥐 인간’ 분석은 강박증을 총정리한 내용으로 매우 구체적인 임상 기록입니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해 정신분석가들이 자신의 임상을 정리하는 경우를 보면 그동안 연구한 내용들을 총정리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저 역시도 임상 내용을 정리하면서 많은 내용을 정리했고, 그것들이 현장에서 유효하게 작용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습니다.
강박증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현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박증에서 나타나는 강박 의례나 강박 행동이 있을 때, 그 행동을 단순히 제거한다고 해서 치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강박적인 손 씻기가 멈췄다고 해서 강박증 치료가 끝난 것일까요? 그 뿌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강박증에는 인지치료가 효과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의식 차원만 다룬다고 해서 그 행동이 쉽게 멈추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행동에는 증상에 따르는 기전이 있고, 또 그 의미가 숨겨져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효과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화 내용을 한번 살펴봅시다. 정석은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합니다. 그의 일상은 별 탈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하루를 계획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거기다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원이라는 아가씨입니다.
정석은 그녀를 두고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언제나 단정한 그녀를 관찰하고 일지까지 작성합니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스토킹처럼 보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매일 정각 12시에, 그것도 초를 맞춰서 방문하고 들어온 사람이 언제나 삐뚤어진 삼각김밥의 줄을 맞춰놓고 그녀를 관찰한 관찰 일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요. 아마 대부분의 여성분들은 이런 태도에 경악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정석은 고백을 결심합니다. 지원의 근무 시간에 나타나서 무턱대고 관찰 일지를 내밀면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공교롭게도 그날은 지원이 아르바이트 시간을 옮긴 날이었습니다. 대타로 편의점을 보는 소정을 보고서는 정석은 기겁을 하면서 관찰 일지도 내버려 둔 채로 도망갑니다. 영화라서 다소 과장된 측면들이 있지만 이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환경의 변화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환경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운명이 정해진 대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이런 특징을 두고 정신분석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체’ 같다는 표현을 해왔습니다. 일종의 좀비와도 같은 겁니다. 좀비가 죽기 전에 하던 행동만을 반복한다고도 하죠.
재미있게도 정석이 지원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그는 매번 같은 시간에 들어가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지원을 봅니다. 그녀의 모습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지원의 단정하고 예쁜 모습은 마치 정물화와도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없는 요소들이 정석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 속 지원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대시를 받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정석이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박증의 핵심 기제로 인해 강박증자들은 사랑하는 것에 서툰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부정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강박증자들은 대체적으로 인연과 관련해 하늘에서 정해준 그 무언가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성 강박증자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어린 시절에 운명의 빨간 실이라든지 혹은 월하노인 설화에 몰두해 자신의 사랑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는 기간들이 관찰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운명 같은 연인이 다가올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운명 같은 연인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마찬가지죠.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나아가서 죽음 생각으로도 이어지곤 합니다. 연인과 죽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연결 관계도 없어 보이지만 그것들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불확실성입니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가지 감정적인 내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란 우리가 경험해볼 수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경험해볼 수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연인도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불확실 상태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다닙니다. 누가 가르쳐주길 바라기도 하죠. 이건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경험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영화 주인공인 정석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초 단위로 맞춰서 생활할까요? 이런 태도가 강박증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강박증에서는 시간을 맞추는 것보다 지각이 훨씬 자주 등장합니다. 시간에 딱 맞추려다가 늦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정석이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름의 안정화 방식을 익혔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가 안정화되기 위해 정해진 방식대로 살게 된다면 그는 불확실성을 피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을 통해 증상의 안정화를 꾀하는 겁니다. 이때는 조그만 변화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에게 강박증자들이 강박 행동을 하는 이유와 같은 것에 대해 불안을 해소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불안 해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안을 가리는 역할을 해줍니다. 마치 바람 불 때 커튼이 날려서 바깥이 살짝 보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강박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강박 사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강박 사고의 출발 역시도 불확실성에 기인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에 차근차근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내용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원의 아르바이트 대타를 뛰고 있던 편의점 주인의 딸 소정은 정석의 관찰 일지에 흥미를 가지고 그 내용으로 '플랜맨’이라는 노래를 만듭니다. 그리고 클럽에서 그 노래로 공연도 하죠.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정석은 불편해합니다. 소정은 그런 정석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따로 지원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합니다. 계획한대로 정석은 지원에게 일지를 내밀면서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일지를 읽어본 지원은 정석의 고백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의 강박증을 고백합니다. 너무 씻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손을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꼭 치료할 거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납니다.
이 영화 장면에서도 뽑아낼 수 있는 것이 무척 많습니다. '플랜맨’이라는 노래는 정석에게 불편한 노래입니다. 자신의 지난 행동들이 그 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강박증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찰되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굉장히 불편해하죠. 물론 이것은 강박증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도 강박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뭔가 일을 할 때 주변에서 보거나 카메라로 촬영하면 불편해서 잘 하지 못하는 상황도 많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일지로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그것은 엄청난 수치심을 동반하게 될 겁니다. 당장 노래를 없애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지원과 따로 만날 수 있는 걸로 퉁쳐버립니다. 이 것과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지식인같은 질문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고민을 지식인에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답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갑자기 몰려오는 수치심으로 인해서 질문을 삭제해야겠으니 답변을 좀 지워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특징에 따라 아마 지원 역시도 정석이 자신을 관찰한 일지를 내밀고 고백했을 때 엄청 불편했을 것 같습니다. 강박증자들에게는 이런 류의 스토킹과 같은 내용이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관찰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변태증이 끼어들면 일종의 관음증으로도 이어집니다. 충동의 성격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강박증자들은 자신이 관찰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실제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정석을 무서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원은 너무 씻어서 엉망이 된 자기 손을 보여줍니다. 강박증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강박적인 손 씻기 문제가 등장한 겁니다. 지원 역시도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정석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앞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정석이 거절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겁니다. 싫어하는건 다 했으니까요.
흔히 결벽증으로 불리는 증상 역시도 강박증의 모습입니다. 이때는 조그만 더러움도 견디지 못하고 끝까지 신경 써서 청소를 해야만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굉장히 피곤하죠. 그리고 또 특징적으로 자기 몸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방은 지저분하게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왜 방은 깨끗하게 청소하지 않는지 스스로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임상에서 이것은 다양한 양상을 보입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도 있습니다. 강박증에서는 눈이 성감대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봐야 합니다. 이러한 강박증에서 등장하는 관음증은 프로이트도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프로이트는 '쥐 인간’의 분석에서 강박증의 시작을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된 관음증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관음증에서 출발한 충동들이 변화를 거치면서 강박증으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유명한 '반복적인 손 씻기’에 대해서 프로이트의 의견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반복적으로 손을 씻는 것일까요? 씻어도 씻어도 부족합니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곧잘 등장합니다. 그 덕분에 강박적인 손씻기는 대중에게 익숙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강박 행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옵니다. 맥베스를 살해한 맥베스 부인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맥베스가 죽고 그 부인은 몽유병에 시달립니다. 몽유에 빠진 맥베스 부인이 멈추지 않고 손을 씻는 시늉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독백합니다. 그리고 하녀들이 그런 멕베스 부인을 보고 수군수군대죠. 아마 작품을 접해보신 분들은 그 장면을 떠올리실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는 것은 지원의 손 씻기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책감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자해’와도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내용이 됩니다. 자해문제는 굉장히 심각하게 여기면서 손씻기 문제는 약간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증상행위 자체는 거의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조금 더 심각하게 보이는 것이 자해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해나 손씻기가 멈추었다고 해서 증상이 치료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책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다면 강박증자는 강박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방어하려는걸까요? 생활 속에서 경험한 어떤 사건이나 혹은 생각들 따위가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입니다. 그 죄책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잘못한 것이 없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가 느끼는 죄로 인해 스스로가 자기 처벌을 해야 하는 겁니다. 즉, 손 씻기를 반복하는 것은 속죄 행동과도 같은 겁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지만, 프로이트의 예시만 이야기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