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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우 Sep 06. 2024

플랜맨(2)

계획에 없던 여자 


상담을 마치고 의사는 정석에게 약물을 처방해 주려고 합니다. 보통은 약물을 처방받아서 먹게 되는데, 정석은 화학물질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약물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실시하는 집단치료에만 참석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정석이 약물을 거부한 이유가 반드시 '건강’에만 있을까요? 그리고 약물에 효과가 있다는 것은 어떤 작용을 하기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런 내용에 있어서 정신의학에서는 뇌와 중추신경 연계를 통해서 설명을 해야 합니다. 의학은 기본적으로 해부학이라는 토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정신분석적으로 검토하면 정신의학과는 좀 색다른 내용들이 관찰됩니다. 많은 경우 강박증 약물을 복용하게 되면 증상이 하나둘씩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적으로 나아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증상이 딱 하나 남는데 그게 잘 사라지질 않습니다. 대체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



약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효과가 나타날까요? 정신분석적인 관점으로 살핀다면 약물이 증상으로 등장해야 하는 에너지를 '철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건 처리가 아니라 철회입니다. 잠시 물러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매일 싸웁니다. 지지고 볶고 이혼하자 어쩌자. 얼굴만 보면 싸웁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싸워서 아내가 지쳐서 정신과 진료를 받습니다. 남편과 너무 자주 싸우니까 괴롭다고요. 그래서 의사는 약물을 처방합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신기하게도 싸우질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임상을 듣게 되면 약의 효과라고 무척 좋아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남편에 대한 예민함이 줄어든 것이 도움이 된 겁니다. 이전에는 사소한 내용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예민하지 않고 둔해진 겁니다. 따라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싸울 이유도 사라집니다. 이런 경우는 좀 괜찮아진다고 해도 더 깊이 사랑한 사람에 대해서는 별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한 만큼 아파야 하는 건 자연스러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신경증 자체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증상도 그 에너지 처리 방식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대신 증상으로 처리하는 건 매우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강제로 '철회’하는 작용이 발생한다면 처리된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실은 처리되지 않은 에너지들이 철회되어서 축적이 되어 있는 건데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된다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괜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견딜 수 있는 에너지가 떨어지게 됩니다. 한계치에 도달하면 다시 기존의 증상들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 잉여의 에너지들을 강제로 억누르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계속 눌러놔야 할 테니까요. 마치 80~90년대 일본에 있었던 푸시 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본에서 기차나 버스에 사람들이 가득 차서 차량 문이 닫히지 않아 출발할 수 없을 때, 힘으로 사람들을 밀어서 문이 닫히게 해서 차량이 출발할 수 있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힘으로 눌러두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정도 선에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 결국 터져나가는 상황이 되죠. 약물이 우리 정신에서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 푸시 맨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석의 경우에는 자기 증상의 안정화 방식을 이미 찾았고 별다른 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약물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별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에게 지원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치료도 생각지도 않았을 겁니다. 실제로 심리치료나 상담을 찾을 때, 실연의 문제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으로 인해 너무 괴로워져 있으니까 그것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자 하는 겁니다. 연애 상담이나 연애 타로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미신에 의존하는 것 같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가는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런 내용이라도 듣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로 돌아가 봅시다. 정석은 병원에서의 집단치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편한 점들을 듣습니다. 비둘기가 무섭고, 사람만 보면 화가 나고, 글자를 쓰지 못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입니다. 그래서 정석 역시도 자기 문제를 말합니다. 시간마다 알람을 맞추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못하고 사람을 못 만납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성 참가자가 자기도 똑같다고 공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같은 의미가 아니니까 그 점을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자기 말이 엉뚱하게 전달되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확실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강제력이 정신에서 어느 정도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을 똑바로 했는지 곱씹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관찰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집단이 어수선해지면서 사람들이 서로 불만들을 털어놓게 되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집단이 진정되고 화해 분위기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정석은 이때도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 자리에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정석에게 화를 냈던 남자가 정석을 허그 하면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정석은 그대로 얼어버려서 세탁소로 직행합니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태도들이 드물지 않게 보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강박증에서 곧잘 관찰되는 것은 '접촉’에 대해서 혐오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접촉 자체를 혐오스러워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접촉으로 인해 발생한 흥분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등장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로 등장하는 내용이죠.


 특히 실제 강박증에서 이러한 접촉 혐오 문제로 고민이 많으신 분들은 좋은 옷을 잘 입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어딘가에 닿게 되면 그 옷을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습니다. 심할 때는 옷을 버리기도 하죠. 영화에서 이 부분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석은 세탁소 아저씨에게 옷을 버려야 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세탁소 아저씨는 옷을 버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으라고 합니다.


 접촉 혐오라는 것이 믿음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그것을 충분히 다룰 수 있게 합니다. 정석은 세탁소 아저씨만큼은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의 흥분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증상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존경 혹은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흥분을 낮춰줍니다. 이는 어떤 증상에 시달리던 내담자가 급격히 흥분했을 때 치료자가 그에 대해서 조언해 주면 금방 진정되는 효과와도 같은 겁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정석에게 괜찮다고 했다면 정석은 진정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강박증에서는 특히 의심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의처증과 같은 방식으로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의심이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할지라도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복종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치료자가 내담자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이 상황에서 정석이 약물치료를 시작한다고 해봅시다.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일단 감각과 신체가 좀 둔해집니다. 이것은 정석과 같은 강박 증자에게는 오히려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약기운으로 몸이 둔해지면 자신의 행동 시나리오를 실천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로 정석은 불안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석이 약물치료를 포기한 것은 어쩌면 훨씬 긍정적인 일입니다. 제 관점에서 봐도 그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증상이 올라와야 단서를 잡고 그 원인을 추적해나갈 수 있습니다. 약물로 모든 증상을 눌러놓은 사람과 분석을 하는 경우에는 마치 대리석을 만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정석은 소정에게 자신의 치료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조금 의아합니다. 지원을 좋아하니까 그녀에게 말을 하는 게 옳을 것 같은데 엉뚱하게 소정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 치료의 과정에서 치료자는 증상을 아는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는 사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증인이 아무 나로 선택되지는 않습니다. 증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문가’를 증인으로 세우고자 합니다. 정신분석가나 정신과 의사를 선택하려고 하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담 관련 대학원을 다닌다거나 하면 축어록으로 상담을 배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어록 내용을 달달 외워서 대화할 때 상담하듯이 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일반적인 생각에서는 비슷하게 상담 효과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똑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그 말이 효과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신경증자들도 자신의 증상을 알아보는 전문가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증상을 호소해도 비전문가의 말에는 그렇게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가치 있는 말에 좀 더 무게를 둡니다.

 신경증의 특성상, 신경증자는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죠. 그 증인의 역할이 자기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돕는 겁니다. 심리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하다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상담자와 내담자가 생기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대신 상담자가 그 역할을 해줄 수는 없고 대상을 찾을 것을 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는 그걸 견디지 못한 융의 모습이 잘 나타나죠?


 소정은 정석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시계를 가져가 버립니다. 처음 시작은 시간부터 지키지 말자는 겁니다. 정석은 굉장히 당황하죠. 그리고 그날 밤, 정석은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꿈을 꿉니다. 꿈에서는 망치를 든 소정이 있습니다. 그녀는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면서 정석의 알람시계를 박살 내버립니다. 그리고 정석은 그날 최초로 늦잠을 자게 됩니다. 8년 만에 도서관에 지각을 한 겁니다. 그리고 회의에서도 계속 안절부절못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정석은 왜 소정의 꿈을 꾼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꿈은 소원 성취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지원이 아니라 왜 소정이 등장한 걸까요? 거기다가 왜 알람시계를 부순 것일까요? 단순히 작가가 시나리오를 그렇게 썼다고 하고 이해를 하면 그만이겠습니다만, 조금은 이론적인 측면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강박증의 치료에 있어서 증상을 히스테리화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히스테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경질 반응은 아닙니다. 보통 히스테리를 신경질 부리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요. 훨씬 다른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글이 길어지니 우선은 진행하겠습니다. 


 대체로 정신분석 역사에서 히스테리에 시달린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잘 고쳐서 소문난 것을 두고 '히스테리에 빚을 졌다’고도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히스테리는 대부분 여성에게서 등장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을 잡고 페미니스트들이 왜 히스테리가 여성에게만 일어나느냐고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중에 프로이트가 남성에게서도 히스테리가 발생한다는 글을 썼는데, 거기까지는 읽어보지 못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꿈에서 강박증은 시계로 대표가 될 겁니다. 그런데 강박증자들에게서 곧잘 관찰되는 것이 시계를 무척 싫어합니다. 강박증에 시달리던 제 과거 내담자도 공부할 때 시계가 있으면 불편해하기도 했었습니다. 시계를 자꾸 보게 된다고요. 강박증자들이 시계를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들은 불확실성에 이끌리는데 시계만큼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싫어하는 시계가 '초 시계'입니다. 초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게 되면 그걸로 잠자기도 힘들어지기도 하죠. 강박증에서 등장하는 청각과민 문제는 불면증 문제와도 직결이 되죠.


 그리고 그 시계를 망가트리는 것은 아무래도 히스테리 기제의 역할일 것 같습니다. 즉, 강박증의 히스테리화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정석이 늘 의존하고 있는 강박 시나리오에 소정이 개입되면서 그 시나리오 자체가 다 엉망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증상의 히스테리화가 시작되는 조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 카피가 참 잘 어울립니다. 계획에 없던 여자라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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