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증상
정석이 근무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출간 행사가 잡혔습니다. MC로 활약한 적이 있던 구상윤 씨의 책을 소개하는 행사였는데, 정석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정석은 과거에 IQ 200의 기억력 소년으로 유명했었습니다. 그런데 정석은 그 기억을 불편해하며 혼란에 빠집니다.
과거의 기억이 힘든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중요합니다.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정체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자기 문제를 통해서 정신노동을 이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듭니다. 거기다가 과거의 기억을 들춰내는 것 역시도 힘이 좀 듭니다. 어떤 내담자는 상담 시간 내내 울기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디지털 정신분석의 특성상, 한 시간 내도록 울어도 타이핑으로 자기 이야기들은 진행할 수가 있었죠. 이때 심하게 우는 것은 저항의 하나로 등장하는 겁니다.
정석에게 구상윤의 존재도 그랬을까요?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기억은 어린 시절의 욕망을 다시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정석은 어린 시절 진우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정석으로 개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개조’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이 좀 우스꽝스럽다거나 부정적인 연상을 이어지게 하는 경우라면 개명을 많이 선택합니다. 만약에 조두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이름을 듣고 범죄자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명을 하게 되죠.
정석의 경우에는 진우라는 이름을 통해 떠올리는 기억을 방어하기 위해 이름을 개명한 것일까요? 마치 특정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해달라는 신경증자들의 부르짖음 같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지만 않는다면 생활이 편해질 것이라고 해서 기억을 지우는 법을 물어보기도 합니다. 아마 상담하시는 분이라면 현장에서 그런 내담자를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당장은 괜찮으니까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그 순간에 불과합니다. 기억이 비의식화된다면 증상은 그걸로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의식을 무의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무의식은 아닙니다. 의식이 잘 안된다는 거죠.
혹은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분석을 위해서 어떤 특정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데 내담자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 말만큼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치료 저항이 이렇게 등장하는 거죠. 분석이 진행되지 않게 스스로 틀어막는 겁니다. 병을 유지하려는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거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병이 낫질 않길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다양한 경우가 있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루 살로메의 일화는 증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릴케가 힘들어하는 것이 많아서 루 살로메가 정신분석을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릴케가 자기 안의 악마를 죽이면 천사도 죽는다는 말을 하면서 정신분석을 하지 않았죠. 예술가는 자기 증상의 승화를 통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병을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현대에는 약물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지 못해서 병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화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 소정은 정석과 밴드를 결성한 상태였습니다. 오디션을 1차 통과한 상태였죠. 그런데 정석은 갑작스럽게 밴드도 그만두려고 합니다. 소정은 그런 정석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줍니다. 그리고 정석이 하지 못하는 행동, 더러운 것을 만지지 못하는 것의 극복을 위해서 고양이를 안겨줍니다. 정석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고양이가 오줌을 싸버립니다. 그런데 이때 잘 보면 품에 안고 있던 고양이가 오줌을 싸면 우리는 놓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정석은 고양이가 오줌을 싸도 놓질 못합니다.
여기서 잘 보면 이때 정석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정석은 공포에 질려있는 상태입니다. 즉, 고양이를 안았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정신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다는 말이죠. 위험하다면 도망을 가야하는데 차라리 잡아먹히겠다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흥분은 졸도로 이어집니다. 자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면 그 자체로 의식을 꺼버리는 작동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조금 오해를 빚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여자 환자인데, 안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눈을 억지로 뜨려고 해도 자꾸 억지로 감습니다. 자기 손으로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 눈을 살며시 뜨려고 합니다. 그럴 때 남자 얼굴은 봐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젊은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될 때입니다. 폐쇄병동에 있으니 간호사들이 이리저리 신경 써주다가 눈을 살며시 뜰 것을 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젊은 여자 간호사의 얼굴이 보이면 그대로 졸도해버리는 겁니다. 그런 경우를 당한 간호사는 기분이 어떨까요?
정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디션이 잘 된다고 소정 같은 예쁜 여자의 포옹에도 겁에 질려서 도망을 갔는데요. 즉 이때 발생한 흥분이 과도하다 보니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정석은 119에 실려서 병원으로 가지만 도중에 일어나서 세탁소에 갑니다. 흥분한 정석이 진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세탁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과장되어서 웃음을 주는 장면입니다만 증상 묘사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배우의 연기도 잘 어울렸고요.
자, 그런데 여기서 정석은 소정과 집단치료의 도움으로 증상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일절 지각하지 않던 정석은 지각대장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치료 효과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석은 이전에 증상을 스스로 안정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방법이 안 되는 겁니다. 그 말은 곧 증상이 발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경증의 이러한 발달은 증상 변화를 일으키면서 치료가 되었다는 착각도 불러일으킵니다. 증상의 일시적 안정도 일어나니까요. 예를 든다면 보통 강박행동이 있고 그게 관찰이 되면 그때부터 '초기 증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증상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강박행동 자체는 강박사고에 대한 방어로 인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즉, 훨씬 이른 시기에 강박사고가 있었고 그것이 떠오르지 않게 만드는 것이 강박행동이라는 거죠. 그래서 대부분의 신경증이 눈치채게 되는 시기가 초기에는 거의 모릅니다. 초기는 잠복기니까요. 그런데 중기 이상이 되어서야 의식적으로 관찰될 가능성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강박행동을 의식하기 전에는 대체적으로 안정화되어 있습니다. 강박증에서 손 씻는 것이 대표적이죠.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는 줄 알다가 나중에 자기가 강박적으로 손 씻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요.
영화 장면을 하나 더 봅시다. 정석은 집단치료 시간에 꿈 이야기를 합니다. 꿈에서 어머니는 항상 빨래를 깔끔하게 다려놓고 빨래를 반듯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정석의 생활 시간표를 자로 그어서 반듯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정석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죠.
우리가 어린 시절에 시간표 만드는 건 학교에서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경계를 알려주는 것은 '알람’이 될 겁니다. 정석에게 알람이 꼭 필요한 이유는 어머니가 시간표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그 이전에 꿈에서 알람을 부수는 소정이 등장했습니다. 시간표와 알람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 알람을 부수는 소정이 어머니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는 말일까요? 전해 내려오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아들 20년 키워놨더니 다른 여자한테 2초 만에 뺏긴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정석에게 어머니의 이미지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병원에서의 집단치료가 끝나게 됩니다. 그동안의 모임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발표회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의사는 혼자서 발표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초대장을 나누어주죠. 정석은 지원에게 그 초대장을 주지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기에 거절합니다. 초대장은 진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라면서요. 그리고 정석은 지원의 그 태도에 실망하기는커녕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소정에게 늦게나마 전달이 되죠.
그리고 이 발표회에서 정석이 지닌 어머니의 이미지가 어떤 내용 때문인지 밝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습니다. 특히 신경증에서는 억압 당시 강한 힘으로 억압된 것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힘이 많이 듭니다. 그만큼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죠. 실제로 분석 후에 두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억압이 그만큼 강했다는 겁니다.
억압 당시에는 사소한 것도 같이 억압된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즉, 진짜 억압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주변에 있는 것들도 함께 억압된다는 겁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석이 말 한마디 듣고 격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점잖던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말을 한마디 듣자마자 분노가 폭발하는 겁니다.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 '사기꾼’이라는 말은 정석의 어린 시절, 진우가 방송에 나가서 들었던 말입니다. IQ 200의 천재소년이 방송에 성공하게 되면 어머니와 떨어져 미국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우는 고의로 방송에서 답을 제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건 당시에 들었던 말이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어린 아들을 보호하려다가 계단 높은 곳에서 추락해 사망하게 됩니다.
'사기꾼’이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듣기에는 충격적인 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말 직후에 일어난 어머니의 죽음은 그 말 직후에 발생한 겁니다.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은 어머니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기꾼이라는 말이 거기에 섞여서 들어온 것이죠. 억압된 내용을 건드릴 때는 격렬한 감정 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우에게서는 강박증적 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진우는 피가 나도록 손톱을 깎습니다. 이러한 자해 행위는 자기 처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자신의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의 자아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벌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일어나는 공격성은 우회로를 거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자해 역시도 이러한 매커니즘에 따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진우가 아직 이차 성징 이전입니다. 위의 매커니즘 자체는 이차 성징 이후에 채택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들에게서도 자해하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특히 갓난아이들도 자기 가슴을 멍이 들 때까지 두드린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마들 중에서는 그런 경우를 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드에 포함되어 있는 죽음 충동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자아가 발달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때의 어린 아기의 이상 행동에서는 의식적 매커니즘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드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죽음 충동 문제를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자해 행위는 의식적으로 관찰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정신적 매커니즘을 활용해서 등장하는 겁니다.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정신분석에서 '유령’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애도하지 못한 이미지를 두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석에게 이때의 기억이 억압된 것이라면 그는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떨쳐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증상의 진실을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 어머니는 현실에 없지만 증상에서 어머니는 재현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그가 지닌 유년의 욕망이라고 해도 되겠죠.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겁니다. 따라서 엄마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애도를 실패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현실에서 진정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유령처럼 뒤에 들러붙어 있는 겁니다. 곧 그는 어머니의 애도를 마칠 수 없었던 겁니다. 애도되지 못한 이미지의 영향은 신경증으로 간섭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이 증상으로 나타난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증상이라고도 부르죠. 프로이트의 유명한 꿈 분석 사례인 '아빠, 내 몸이 불타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라는 사례를 아신다면 조금 더 이해가 수월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가봅시다. 발표회가 끝나고 정석과 소정은 함께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정석은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소정에 대한 신뢰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고백도 하고 소정은 그것을 받아들여 줍니다. 기쁜 마음에 소정은 입을 맞추는데 정석은 그 입맞춤에 그대로 졸도해버립니다. 첫사랑이 가져다주는 황홀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강박증의 치료에서 중요한 것이 타자의 욕망에 직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사랑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 실제 강박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서는 종종 분석하다가 갑자기 애인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동안 현실의 이성을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것이 완화되면서 이성을 만나고 연인 관계로 급격하게 발전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이 들리겠지만 실제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납득이 되진 않죠.
현실의 첫사랑은 그동안 어머니의 사랑에 고착되어 있던 정석을 해방시켜 줄지도 모릅니다. 드디어 그는 타자의 욕망과 대면하며 고착에서 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