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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Sep 25. 2016

저는 아마 마드리드에서
죽어있었나 봅니다

천국에 다녀왔으니까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난생처음 스페인으로 가는 아침 7시 비행기를. 너와 나는 함께 스페인행 비행기표를 수도 없이 많이 찾아보았지만, 기어코 남이 되어 이제는 그 어디에도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홀로 너와 내가 100번도 더 함께 갈 수 있었던 그곳으로 향한다.


 다만 다정한 친구와 그녀의 남편이 나를 지극 정성으로 호스팅해 줄 테고, 나는 현지인 동무들과 함께 상그리아니 빠에야니 하는 모든 맛있는 것들을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또 두고두고 꺼내 먹을 만한 추억이 하나 생길 테고, 4박 5일은 짧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호의와 충만감 속에서도 문득문득 스페인에 대해 나누었던 너와 나의 그 모든 대화들과 끝내 결제하지 못했던 항공권들이 생각 나 조금은 심난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지루한 말로 '안녕'하지 않았지. 다만 침묵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지. 그 느린 속도만큼, 서로에게 던졌던 고통의 깊이만큼, 딱 그만큼만 너를 애도할게. 스페인은 분명 아름다울 테고, 친구들은 나를 사랑해 줄 테고, 그 한가운데 서 있을 나 또한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야. 너는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네 곁에 서있는 사람들과 마저 아름다우렴. 각자의 장소에서 여전히 예쁘고 곱게 지내자꾸나.


 Que te olvides de mí. Adios.'





*  *  *





 엘레나와 나는 더블린의 어학원에서 만났다. 겨우 2주 동안 같은 반이었고, 고작 1번의 점심 식사를 함께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나 사이에 통하는 무언가 있었는지 우리는 그녀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서로에게 손엽서까지 보내며 소통을 이어나갔다. 항상 스페인에 너의 집이 있으니 언제든 놀러 오라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막상 너를 보러 마드리드에 가서 며칠 놀다 와도 되겠냐는 말을 하려니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여 망설여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좋은 사람들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꾸준히 그 무엇보다도 더 진심일 수 없는 말을 내게 하고 있었고, 나는 그야말로 대환영을 받으며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10년째 살고 있는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에 도착해서는 우선 그녀의 회사에 들러 집 열쇠를 받아야 하는데, 내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회사 앞까지 잘 찾아가 놓고서도 그녀를 부를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가던 길 잘 가고 있는 세련된 커플을 막아 세웠다.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낯선 이에게 말을 걸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저 스페인어 잘 못해요. 죄송합니다.'라고 일단 스페인어로 운을 띄운 다음 영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촉은 정확했고, 마침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더니 근처에 있는 한국음식점의 위치까지 알려주던 상냥한 커플은 내게 흔쾌히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그녀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총알 같이 튀어나왔고, 그 커플은 자기들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우리의 재회를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졌다.  



 우선 집에 가서 그녀가 귀가할 때까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침 6시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느라 전 날 한숨도 자지 못해 너무 피곤했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드디어 가방을 풀고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는데, 열쇠 사용법이 어려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유럽의 열쇠들은 항상 나를 진땀을 빼게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또! 열쇠고리를 부수면서까지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두 번,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문은 기여코 열리지 않았다. 나는 절망에 빠졌으나, 사람이 절박하면 어떤 짓이든 하게 되는 법이다. 나는 그 아파트에 있는 모든 이웃집의 벨을 눌렀다. 바캉스 시즌이라 마드리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가를 떠났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직장에 있을 시각이었다. 기적적으로 아래층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고마워, 미안해, 나, 엘레나, 친구' 이번에도 역시 내가 아는 모든 스페인어 단어를 나열하며 운을 띄웠다. 서바이벌 스페인어와 함께 몸짓 발짓을 섞어가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아주머니는 왼쪽으로 세 번을 돌려야 한다며 문 열기를 시연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안전히 집 안으로 들어가 곧 낮잠에 빠질 수 있었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내가 잠에서 깨길 기다리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깔깔대며 웃었다. 나를 보내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아래층 이웃에게 전화를 받았다며, 네 중국인 친구 집에 잘 들어갔다며, 열쇠 사용법을 몰라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네, 제가 비록 중국인은 아니지만 고마웠어요 아주머니.




 

/




 우리는 함께 집 근처의 노천 바에 들러 산들바람을 맞으며 그간의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목의 문신을 보더니, 또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더니 살짝 놀라던 그녀는 이내 내게 적응을 하고 나를 받아들였다. 그건 어려울 것이 전혀 아닌 너무나도 명쾌하고 간단한 일었이다. 그 어떤 판단도 평가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껴주는 14살 연상의 친구라니,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이건 만일 내가 용단을 내리지 않고 한국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절대 경험해보지 못했을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스스로를 칭찬한다. 잘 기어 나왔다고, 어렵고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이대로 고스란히 보상받고 있지 않느냐고, 정말 잘 했다고 말이다. 



 그녀의 남편, 에두아르도가 곧 우리를 만나러 왔다. 너무나도 다정하고 신사적인 분이었다. 부창부수라더니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구나 싶었다. 우리는 맥주와 레모네이드를 섞은 와인을 한 잔 씩 마신 뒤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마련했다. 햄이니 치즈니 과일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을 두고도 세심하게 원산지와 조리법 등을 설명해 주는 그들에게서 무한한 친절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은 또 어찌나 즐거웠던지. 거실 장식장은 좋은 음악 씨디와 화집, 책들이 가득히 꽂혀 있었고, 벽은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들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우리들의 취향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나의 스페인 영화와 음악에 대한 지식에 놀라워했는데, 대체로 마니악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마니악한 취향이 좋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역시 세상에 쓸 모 없는 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밤이 깊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늑한 손님방에 몸을 뉘었다. 열대야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내가 1년째 살고 있는 이 두 섬나라는 너무나도 춥고 비가 많이 와서 한여름에도 꼭 솜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데, 차가운 바닥에 누워 차가운 벽에 다리를 대고 잠을 청하고 싶은 기분이 든 것이 대체 얼마만이었던가. 입 안과 입술은 자꾸만 건조해져 갔고, 나는 그토록 건조하고 뜨거운 날씨에 놀라 연신 물을 들이켰다. 내 집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 다른 나라로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 것은 과연 8개월 만이었다. 이미 외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외국으로 여행을 왔다는 기분에 들떠 다음날은 꼭 작은 수첩을 사서 이런저런 것들을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마 조금은 뒤척였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동이 트기 전에는 잠에 들기 마련이고, 곧 둘째 날을 맞이할 수 있을 터였다. 



 마드리드의 첫날은 여러모로 따뜻하고, 그 따뜻함이 넘쳐 덥기까지 했다. 그 열기가, 그 애정이, 아직 감각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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