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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Jan 16. 2017

Fragments

2017년을 시작하며 

2 January 2017


 다리 위에는 바람이 불었다. 족히 백만은 되는 것 같은 인파에 끼어 발을 동동 구르며 불꽃놀이를 기다렸다. 강변은 싸늘했으나, 사람들은 허들링을 하는 펭귄들처럼 서로를 감싸주었다. "2016년 함께해서 정말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소리를 쳤다. 그러다 지난해의 좋은 기억들이 떠올라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불꽃이 터지는 10분 동안에는 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의 내 모습이 사진으로 남겨졌다면, 내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나도 그 사진은 오래오래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2016년을 밝혀주었던 이들에게 새해를 핑계 삼아 연락을 해볼까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결국 잘 참아냈다. 우리의 안녕은 서로의 부재로 완성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것은 꽤나 어른스러운 새해의 시작이었다. 


 1월 1일 새벽의 런던 거리를 3시간 동안이나 쏘다닌 나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


5 January 2017


 시간이여 그냥 흘러가세요. 지난 2년 동안 갈림길에 서 있을 때마다 매번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한 뒤 가장 아름다울 법한 길을 선택해 왔어요. 그러나 딱히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었네요. 그래서 절망도 많이 하고 가끔은 다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죠. 이젠 아등바등 계획하고 다짐하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일은 때려치울까 합니다. 새해여, 난 알아요. 넌 올해도 네 멋대로 나를 여기저기로 데려다 놓은 뒤 어리둥절한 표정 짓는 걸 구경하며 피식피식 웃을 테죠. 그러니 너는 올해도 네 맘대로 하세요. 나는 이제 그저 시간이 이끌어 주는 대로 살렵니다. 


 오히려 지난 2년 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계획과 예상의 원 밖에 있었거든요. 다만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는 올해도 그만큼 아름다운 순간들을 문득문득 마주하게 해달라는 것이에요. 그럼 난 또 힘을 내서 읏샤샤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


7 January 2017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귀향을 감행한 오늘 여러 가지 마음이 내 안에 들락날락한다. 거기에 목련이 필 때쯤이면 친숙한 사람들을 다시 마주할 것이고, 여기에는 다시는 만나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남겨질 예정이다. 나의 다음 봄은 이별과 재회로 넘쳐흐를 것이다. 뭐, 우리들 각자의 삶은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나름대로 굴러가긴 굴러갈 텐데. 언제나 그랬듯이. 각자의 나라에서 열심히 살다가 문득문득 나를 떠올리며 피식하고 미소나 지어주면 충분할 것 같은데, 나는 그 미소를 보기는커녕 생사 유무마저 확인할 수 없게 될 테다. 분명 너희들은 살아서 움직이며 인생의 굴곡을 겪어낼 텐데, 나의 세상 안에서는 가장 귀엽고 깜찍하게 빛나던 그 모습 그대로 박제가 된 채 늙지도 추해 지지도 않을 것이다.



*


10 January 2017


 이 섬나라에 4시도 전에 해가 져버리는 습하고 싸늘한 겨울이 온 이후 스트레스에 저항할 수 있는 면역력이 0에 수렴하고 있다. 여름의 나는 그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했다. 그만큼 긍정적으로 살아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아주 조그만 자극도 거대한 납덩이로 변해 내 온몸과 마음을 저 아래로 푹 꺼뜨려 버린다. 그것들은 대체로 사람들에게서 오는 자극이고, 어쩌면 인간에 대한 모든 애정을 잃을 것 같은 위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나는 늘 외로움에 지쳐 마음 맞는 누군가를 찾다가도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게 될라 치면 냅다 도망쳐 혼자 강물이나 바라보며 안정을 찾는다.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있어 단 1초도 불편한 사람 앞에서 웃지 못하는 정말 피곤하리만치 까다롭고, 사회성 없고, 또 싹수없는 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그 여름의 충만함 또한 그런 모지리 같은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에게서 비롯했던 것 같다.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것도, 나를 저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것도 다 사람이라 생각하니 역시 나 또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구나 싶다. 스스로가 너무 시시해도 별 수 없다.


 내 맘 같지 않던 지난 몇 해를 겪다 보니 조금은 유연해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또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상처받지 않고 몸 사리기에는 그 생이 소름 끼치게 지루해서 차라리 대차게 마음 엮고 장렬히 상처받으리라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다정하고 고운 사람을 만날 때, 조건 없는 호의를 받을 때의 몰캉해지는 마음을 느끼는 일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나는 늘 이렇게 간장종지 만한 그릇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또 받으며, 여기저기 마모되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마모되다가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게 되지 않기를, 또 마음 엮는 일에 결코 두려움 느끼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생 독고다이. 결국 혼자 해내야 하는데, 그대들이 찰나의 순간순간에 내 곁에 머물러 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뭐, 이제 만나 볼 수 없는 것, 여전히 나를 쓸쓸하게 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염세주의자가 되기에는 아직 어리고, 마냥 희망에 차 있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 만 27세도 딱 반을 살았다. 내가 조만간 돌아갈 곳에서는 내가 벌써 29이라고 한다. 적당히 가면도 써가며 나잇값 하며 살 수 있겠지.



*


14 January 2017 


 모호한 경계에 살게 되는 날들이 있다.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으나 분명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때. 짐을 싸서 떠날 기대와 동시에 그 아쉬움에 먹먹해지는 때. 새로운 꿈을 꾸면서도 진부한 미래에 발 담글 준비를 하는 때. 

 

오늘 하늘엔 과열되어 터져버릴 듯한 백열전구 같은 달이 떴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자리에 서서 오리온자리를 바라보는데, 달빛이 너무 밝아 그 선명한 별자리마저 보이지 않는다. 미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오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시 돌아갈 그곳에서의 내 앞날들이 오늘의 달처럼 밝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이 정도 희망이라면 그다지 사치는 아닐 것이다. 때로는 마음이 닳아 없어질 만큼 애를 썼으니까.

 

 아마도 이 모호한 나날들은 올해 내내 지속될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그토록 금세 잊을 리가 없으니, 이곳에서의 나는 이 달보다 더 밝은 추억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을 종종 가져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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