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면 작별 인사 정도는 건넬 용기 생기겠지
16개월. 영어가 모국어인 두 나라에서 머무는 시간 동안 벌써 6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이 기간 중에 나는 사람 또한 참 많이도 갈아 치웠다. 캐리어에 인생을 넣어 끌고 다니는 모두가 본의 아니게 그렇게 살아오고 있겠지. 장소가 바뀌면 자연스레 사람도 바뀐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내가 아닌 누군가는 장소를 바꾼다. 그 누구도 장소를 바꾸지 않는 아주 드문 시간들이 종종 오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도시에 숨 쉬면서도 이별할 수 있다.
어떤 이별은 달다. 언젠가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서로가 서로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확신이 있는 때의 이별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기대되는 미래를 하나 더 갖게 되는 셈이니까. 반면에 어떤 이별은 쓰다. 우연을 가장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고, 장소가 바뀌면 그 가능성이란 극히 희박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불가능에 가까운 그 희박함 속에서 나는 그들의 장례를 치르고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애도를 해야만 하니까. 그 어디에도 환희에 가득 찬 애도는 있을 수 없을 테다. 희망이 없는 애도는 늘 우리 각자의 몫이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 굳이 겪지 않아도 괜찮았을 이별들이 한두 달 사이에 한꺼번에 몰아쳤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한 줌 정도 남은 내 생을 캐리어에 고이 싸서 비행기를 탔다. 세계 곳곳에서 온 동무들을 만났다. 처음엔 그 이별이 또 서글퍼 찔끔 울기도 했다. 그리곤 깨달았다. 이별이 뭇 내 서러워 흘리는 눈물이란 귀하기는 하지만, 매번 감당하기에는 조금 벅차다는 것을. 그리고는 또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사랑 또한 한국에서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교감하는 마음이 깊은 만큼, 서로를 만지던 손길이 뜨거운 만큼 이별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가움이란, 서로가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세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 서로에게 등졌을수록 더 잔인하는 것 또한.
한 해 중 가장 낮이 짧다는 동지의 하루가 완전히 저물고 있다. 오늘 이 곳 런던의 일몰 시간은 오후 3시 54분이었다. 이제 며칠 안에는 4시에도 해를 볼 수 있을 것이고, 조금만 더 참으면 5시까지도 밝은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제 우연히라도 만나볼 수 없는 사람들과의 완전한 이별을 확정 짓게 될 테고, 우리는 오직 기억 속에만 남아 각자의 나라와 도시에서 나름의 생을 살아갈 것이다. 언제 우리가 함께 강변을 산책했냐는 듯, 언제 우리가 함께 부리또를 먹었냐는 듯.
이별을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여기에서도 이별을 피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이별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끝이 아무리 더러웠건 간에 여자든 남자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일단 마음을 한 번 엮으면 줄기차게 애틋하게 기억하는 성격 탓에 내 인생은 앞으로 더 피곤해질 것이다. 나에게 이별이란 그저 ‘끝’이 아니라 미래에 먹고 살 추억을 의미하는 것이라서 말이다. 추억은 생을 풍요롭게 하지만 때때로 아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므로, 앞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들을 많이 많이 만들어버린 나의 생이 앞으로 더 성가셔질 것은 뻔하지 않은가.
어제 누가 그랬다. 어둠 뒤에는 빛이 온다고. 낮이 가장 짧다는 날이 지났으니 내일부터는 태양을 조금씩 더 많이 마주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나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질 테다. 곧 두 섬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나의 마음이 결코 즐거울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나 자신을 더 열심히 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돌보다 틈이 나면, 그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만날 수 없을 이들에게 잠시나마 나의 일부가 되어주어 고마웠노라 작별 인사 정도는 건넬 용기는 갖게 되지 않겠는가.
그 용기가 꼭 실행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