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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Jan 14. 2019

지나온 어귀마다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타인의 삶을 빌어주는 일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속이 좋지 않아서 교실 뒤쪽에 토를 하고 보건실에 간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던 중 도저히 참지 못하고 실수를 한 것이다.

다음 날 알게 된 사실은 한 친구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걸레를 빨아와 내 토사물을 다 치웠다고 한다.

사물함 등에 튀긴 자국들까지도 손걸레로 일일이 치웠다고.


당시 새 학기라 나는 그 친구와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고마움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나이였지만, 용기 내서 고맙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과연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토사물을 치워줄 수 있을까? 그때의 그녀처럼 나 역시 힘들어하는 사람의 허물을 닦아주고 뒤를 지켜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실수에, 상처에 눈감아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을 화젯거리로 삼지 않는 사람. 묵묵히 속으로 응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구역질을 할 때면 항상 누군가 곁에 있었다. 따뜻한 손길이 내 등을 토닥였고, 더러운 흔적을 군말 없이 치웠다. 내가 힘이 들고 지칠 때 어김없이 그들은 내 곁에서 사랑을 줬다. 어떻게 보면 그들 덕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 덕분에 내가 사랑을 배웠다. 그때 배웠던 사랑들로 인해 내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 그렇게 받았던 감사한 마음은 차곡차곡 내 마음에 저장되어 그때의 나처럼 힘든 사람을 보면 하나씩 풀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랑을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잘 알기에

마음을 받고, 마음을 쓰는 일을 늘 소중하게 다뤘다. 작은 선물을 받아도 늘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또 나 역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해줄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지내는 공간이라서 마음을 쓰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성인이 되어 대외활동을  할 때 장염에 걸린 적이 있었다. 물을 마시자마자 갑자기 반응이 왔고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힘겹게 화장실 칸막이에 서서 채 문을 닫지도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동료는 화장실 입구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더니 반쯤 열려있는 칸막이 문을 열고 들어와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괜찮아? 어떡해. 그녀는 내 등을 두드리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있던 내게 그녀는 약국에서 소화제부터 장 건강 음료까지 배에 도움이 될 만한 약들을 건넸다.

뭘 이렇게 바리바리 사 왔냐는 내게 속이 더 안 좋아질까 봐 물약으로만 골랐단다. 그러더니 편의점에서 사 온 물을 따서 내게 건넸다. 물이 따뜻했다.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물을 데워왔어, 따뜻한 음료는 파는데 따뜻한 물은 안 팔더라고, 그리고 넌 정수기 물보단 끓인 물을 더 좋아하니까.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내가 아파서 우는 건 줄 알고 당황했다. 누가 나의 아픔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겠는가.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눈물에 섞여 흘렀다. 미안해. 나는 이렇게까지 해주지 못해서. 그 이후로 나는 아플 때 따뜻한 차 한잔, 약 하나 선물하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주변 사람들이 아프다고 하면 늘 기프티콘으로 비타민 음료를 보내준다. 주로 편의점에서 파는 광동쌍화탕을 보내주는 편이다. 그렇게 보내는 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사랑이다. 나를 위해 달려가서 약을 찾고, 또 전자레인지에 물을 데워왔던 그녀처럼 나도 내 마음을 온통 담아 볕이 잘 드는 공간에 걸어두고 싶다.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오래도록 마음에 향기를 남기는 말들만 하고 싶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누군가를 공감하며 살려한다.


내가 21살 때, 24살의 한 언니를 알게 되었다.

어느 겨울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그녀는 자기 주머니에서 usb 충전 손난로를 건넸다.

"지연아 너 가져."

분홍색 하트로 된 손난로였다.


"이거 언니가 쓰시려고 산 거 아니에요?"

"언니는 괜찮아.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내가 생각나서 샀다며 만날 때마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사서 주고, 내가 고민이 있을 때면 언제나 택시를 타고 우리 동네로 와줬던 언니.


나는 그녀의 생일에 백화점에서 M사 머플러를 사서 선물로 줬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생일에 좋은 글을 많이 쓰라며 다이어리와 펜 세트, 편지를 줬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오고 갔던 그해의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그 날이 드문드문 생각난다. 지금은 그녀가 외국에서 살고 있어서 잘 만날 수 없지만 정말 감사한 인연이었다. 나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문득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의 소중한 것을 선물하고 사랑을 남길 줄 알아야지. 그녀가 외국에 가고도 몇 번을 되짚었던 말, 몇 년이 지나도 그녀가 남기고 간 마음이 감사해서 삶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하겠지만 말이다.


내 온 마음을 그녀에게 걸어 그녀의 삶이 평온하길,

늘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온통 바라고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지나온 시간 어귀마다 참 고마운 사람들,

따뜻한 시간들이 머물러있었다.


누군가의 시간에도

내가 따뜻한 기억으로

머물렀으면,

연락이 잘 닿지 않는 관계일지라도

오랜만에 생각났을 때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타인의 삶을 빌어주는 일.

누군가의 삶을 어루만지는 것,

참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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