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불을 밝히고 있을까.
휴일의 의미가 달라졌다. 매일이 휴가인 백수에게 휴일은 도심이 한가해지고 남들과 함께 노는 날이다.
직장인이던 시절, 연말이면 다가오는 해의 휴일이 며칠이고 징검다리 휴일에 어떻게 휴가를 낼지 고민하고 비행기를 예약하곤 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휴일에 이렇게 무감각하다니. 그러고 보니 요일에 대한 감각도 달라졌다. 월화수목 금금금이던 시간들이 가물가물하다. 이렇게 금세 잊을 기억이었다니, 어렸던 탓일까. 그 당시엔 몸서리치며 힘들어했다. 이제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들어가던 날들이 아름다운 야경으로 기억된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러나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철야와 야근, 반복되는 늦은 퇴근은 삶을 갉아먹는다. 신입 이년차까지 누구보다 늦게까지 남아 제일 마지막에 퇴근을 했다. 그게 아니면 회사 뒷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자정을 넘겨 강남을 벗어나 강북으로 향했다. 텅 빈 강변 북로는 나와 비슷한 이를 태운 택시들만 달리고 있었다. 이십 대였던 나는 사고 날까 무서워 뭐라 말도 못 하고 총알택시 안에서 졸리는 눈을 부릅뜨고 내리자 마자 캄캄한 골목을 냅따 달리곤 했다. 야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기 시작한 건 내가 삼십 대를 접어든 후의 일이다.
퇴사를 하는 순간부터 일상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너무나도 쉽게 지워지는 기억들과 변해버린 일상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다.
야근, 주말특근. 버릇처럼 입에 붙던 단어들이 일상에서 사라졌다. 매번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타이트하게 밀어붙였던 종일의 업무 시간, 회의 한 번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오전이 아까워 김밥이나 샌드위치 따위로 해결하던 점심시간,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내 머릿속의 모든 회로를 작동했던 4시 50분. 그리고 나의 업무를 다 끝냈음에도 선배의 등 뒤를 배회하며 예의를 갖추기 위해 기다렸던 5시 30분. 이 모든 쳇바퀴들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정시 출근, 정시 퇴근마저도 기억나지 않는 내게 야근은 정말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백수의 시계는 기준이 없다. 누군가는 그 기준이 무너지면 안 된다며 다시 새로운 쳇바퀴를 만들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같더라. 그 또한 선택지 중 하나이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벌던 때와 다르지 않은가. 낭비할 돈이 없는 나는 시간이라도 낭비하련다.
휴일을 하루 앞둔 저녁, 오랜만에 백수남편이 모는 스쿠터를 타고 종로를 향했다. 바람도 상쾌하고 하늘도 깨끗한 밤. 백수로 지낸 시간이 더해져 더 두툼해진 남편의 배만큼이나 우리의 여유로움은 넉넉해졌다. 상쾌함을 가득 머금은 밤에 반짝이는 빌딩이 있어 적당히 예뻤다.
이름이 꽤나 알려진 설계사무소 옆을 지났다. 사옥이라기엔 작은 평수지만 그래도 꽤나 높은 건물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불이 들어와 있다. 아, 나의 옛 동지이자, 적이었던 친구들은 지금도 일하고 있구나.
종로의 빌딩 숲을 밝히는 빛을 보고 나니 내가 다시 회사원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나 집에 가고 싶을까.
휴일을 앞두고 집에 가지 못하는 그 빡치는 심정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왜 집에 가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왜 기다려야 할까요?"
사원 시절이면 감히 내뱉지 못했을 말을 실장이 된 덕분에 내뱉을 수 있었다.
단 한 명의 허락을 기다리며 열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중 가족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는 8명 즈음, 내게도 먼저 퇴근한 남편이 있었다. 하릴없이 웹사이트를 뒤적이는 다 큰 어른들은 더 큰 어른 한 명의 허락을 기다려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혹시라도, 만일,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 큰 어른 네 명이서 현장에서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멀리 떨어진 그들의 심야 토론이 끝이 날 때까지 본사의 의 열 명은 집에 갈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억울한 시절이 있단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힘을 가지게 되면 바꾸면 되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래. 조금 더 기다려봐. 너도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거야.'
백수의 길에 영영 발을 붙여버린 내겐 억울함을 참을 시간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이 멍청한 상황을 바뀔 기회도, 그분의 마음을 이해할 절호의 찬스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은 지금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들었던 말과 똑같은 얘기를 후배들에게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회사를 떠나 만들어가는 저녁의 삶,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하는 소박한 식사, 누군가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소한 약속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지나가면 별 거 아닐 작은 일을 커다란 사건으로 부풀려가며 이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부각시키는데 일가견을 가지게 된다. 적어도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는 퇴근하지 않고 늦은 저녁까지 불을 밝혀야 했던 이유는 그러했다.
사무실의 불을 다 꺼버리고 집으로 가라고 외친다 해도 익숙해진 직장인들은 스스로 불을 켜고 묵묵히 일을 할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 야근으로 저녁을 보내는 것이기에. 정해진 시간 외에 일을 거부하는 젊은 친구들의 분위기와 달리 많은 선배들이 넘치는 업무를 저녁마다 해내고 남은 시간은 웹서핑과 누군가와의 한잔으로 때우곤 했다. 그렇게 저녁마다 방황하곤 했다.
"그저 열심히 남들처럼 했을 뿐인데."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모든 직장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한다. 꾸준히 묵묵히. 그리고 길들여지고 익숙해진다. 저녁이 없는 삶이 편해진다. 야근이 없어지고 회식이 줄어들어도 회사 근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삼삼오오 모인다. 불 켜진 사무실에서 부대끼던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 진한 향수가 그들에게만 남았다는게 안타깝다. 그리워할 시간이라 말하기엔 너무 아까운 나의 시간이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휴일을 앞두고 종로를 밝히는 불빛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