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도로 이직했습니다

라이킷 3 댓글 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NanA Feb 05. 2019

만약,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지 못했을 일들에 대하여

이건 쓸데없는 일이야.

해보지 않아도 안다고 생각했다.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뭐든 내게는 단순하다. 경험과 연륜이 쌓일수록 판단은 더 빨라졌고 후회는 점점 사라졌다. 어른이 된 순간부터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후회하지 말 것.

반복하지 말 것.

생각은 오래 하되 고민하지 말 것.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 복잡하게 상황을 바라보지 말 것.

해보지 않은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해봤자 안 될 것 같으면 시도하지 않는다. 내게 세상은 흑백이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그리고 그건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중요 순간마다 양 갈래로 선택지를 모아 결정을 내린다. 상황을 매우 극단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지만 망설이고 미룬다 한들 언제나 시간만 흐를 뿐 다시 그 선택지 앞에 서 있게 되기 일쑤였기에 낭비되는 시간을 아낄 뿐이다.

어차피 선택이란 후회가 따라붙는 것이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한들 결론은 둘 중 하나이니 그 시간에 얼른 마음을 정하고 불 속에 뛰어들었다. 타 죽거나 얼어 죽거나 죽는 건 매한가지.

빨라진 결정만큼 또 선택이 금세 다가오곤 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은 괜한 말을 아니다. 매번 인생은 새로운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었고 그에 대한 보상인 듯 난 매번 선택에 만족하고 행복했다. 그 반복된 패턴 속에 웬만한 건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 누가 뭐래도 내 의지에 의한 불행은 행복과 별반 다를 바 없었고 그래서 만족했다.

덕분에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거나 다니지 않거나. 그 중간의 회색지대에 멈춰 고민하고 망설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걱정하는 시간이 없었다. 성격 탓일 수도 있고 그간 겪어왔던 나만의 성장통 때문일 수도 있다.

고민하며 보낸 시간이 없었던 탓에 백수생활도 즐거웠고 다시 무언가를 새롭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잘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망하기 전에 그만두는 타이밍을 잘 알면 되는 것이다. 노느라 돈 쓰는 건 아깝지 않지만 쓸데없는 데 힘쓰고 돈 쓰는 건 매우 아까웠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을 벌일 것. 그리고 빠져나올 때와 몸을 사릴 때를 잘 알 것, 그건 나의 백수 생활의 신념이었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백수로 2년이란 시간을 보낼 기회가 없었다면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이제는 옛 동료가 된 사람들 속에서 9년 동안 반복되던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9년에서 11년이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회사라는 울타리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언젠가는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변을 기웃거릴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무기력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왜 아직도 자신의 사업을 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반성하며 동기들과 선배들의 성공담 앞에 조금은 자신을 초라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힘주어 내세울 것이 회사의 이름밖에 없음에 열등감을 느껴 오히려 더 회사의 개가 되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백수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예상되는 나의 인생이다.

백수의 시선에서 바라본 직장인은 '현대의 장인'과 같다. 꾸준히 반복되는 감정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삼키며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차곡차곡 해나가는 것은 월급과 사회적 안정감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갈 곳이 없어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푸념은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사회가 내게 준 자리이자 내가 선택한 자리, 누군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용기와 모험의 시작이라 말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끝까지 함께 하는 것 역시 용기이고 모험이다.

어떤 회사를 다니냐 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냐 와도 다른 것이다. 그저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울타리 밖에 나오면 알게 된다.

백수가 되고 나서야 나는 일을 하는 사람, 직장인 혹은 노동자에 대한 경건함을 느낀다.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존재들은 개미에 불과한 보통의 직장인이다.

그렇다. 백수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보통의 개미의 일부가 되어 스스로를 한껏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모험을 동경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보통의 일상을 폄하했을 것이다. 성공담보다 더 많은 실패담을 외면하고 성공한 1인이 되지 못한 이번 생을 후회했을 것이다.

예전에 유라시아 횡단에 대한 서면 인터뷰를 진행하며 모험을 도전하며 망설이는 이를 위한 조언을 한다면 무엇이 있겠냐는 질문이 있었다. 내 대답은 대략 '대한민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위대하고 대단한 일은 없다. 그러니 모두에게 모험이 정답은 아니다.'였다.

내게도 백수의 삶은 정답이 아녔을지도, 다만 그로 인한 변화가 예상보다 컸고 달라진 삶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다시 못 돌아갈 대기업의 직장인의 삶이 가끔 부럽기도 한 걸 보면 선택의 한 단면에 남은 미련은 비워낸다고 비워지게 아닌가 보다.

모험보다 어려운 것이 머무르는 것, 변화보다 힘든 것이 변하지 않는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똑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외치며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봐야 한다는 것 또한 모순이다. (하나같이 여행을 떠난 자들은 어서 빨리 삶을 변화시키라 말하더라. 나의 경우, 누군가의 조언이 변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저 응원이 필요했을 뿐.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라면 굳이 남의 말 듣고 떠나진 않는다. 쓸데없이 난무하는 응원과 부추김은 괜히 잘 지내는 사람들 엉덩이만 들썩이게 만드는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오늘도 내일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