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년만에 다시 김실장이다.
나는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정확히 평화동이다. 그때 내 세계는 평화동이 전부였다.(시내는 한 군데였다. 시내가 여러 곳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대학 가서 처음 알았다.) 버스를 타고 전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것도 큰 변화였다. 그랬던 고등학생이 북적이는 홍대로 입학했다. 월드컵의 열기가 뜨거웠던 2002년, 나의 세계가 아주 커졌다.
지하철이 무서웠던 20대 초반의 지방 출신 대학생이 ‘너는 서울 사람인 줄 알았어.’라는 말을 듣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그 동네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도 그 분위기에 물든다. 고등학교는 아름답지 않았다. 대학교는 다르리라 기대했고 열심히 사랑했던 곳이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비슷한 것 같다.
지금은 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만나는 세상은 커져가지만 그 속의 사람은 똑같다는 것을.
한참을 돌고 돌아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걸 알기전까지 나는 언제나 더 큰 세상을 향해 달렸다. 내가 속해 있는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당연한 꿈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세상, 더 높은 사람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나를 더 사로잡았다. 서른 살 전에 대한민국을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고 당당히 돌아와 멋진 여자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한창 접시딱이를 하면서 유학을 했던 선배들의 무용담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당연하지, 그 고생을 만회할 만큼 돌아와서 누렸으니까. 내가 본건 선배들의 접시닦이 시절이 아니라 이미 누릴 만큼 다 누린 화려한 모습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더 큰 세상을 나가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서울에 살았다.
그리고 무난하게 강남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잠실과 신천의 뒷골목에서 밤늦도록 술집을 전전하던 대리 시절에는 사랑하는 홍대를 떠나 강남에 입성하는 것을 꿈꿨다. 친구들이 차를 사고, 집을 사고, 결혼을 했다. 더 큰 세상을 만날수록 더 많이 가진 이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자격지심과 그럼에도 결국 밀릴 거라는 좌절감에 시달렸다. 그즈음 꿈은 건축가에서 억 대의 연봉으로 바뀌었다. 이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들이 자리를 잡지 못해 대학원이 붐비었고 유학생 출신치고 똘똘한 놈을 보질 못했다. 적당히 살 만했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보다 나의 젊은 시절은 풍요로웠다.
스물여덟의 가을에 남편을 만나고 나서야 그 적당히 살만한 상황과 풍요로운 삶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가끔 가슴이 요동치며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정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선택에 대한 외로움과 후회가 밀려들고 다시 사그라든다. 꿈이니 직장이니 그런 것은 그저 내 삶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물론 돈은 있어야겠지. 가난한 건 싫으니까.) 사랑하는 이와 평화롭고 적당한 일상, 그 안에 약간의 부족함과 슬픔이 담기고 원망과 후회가 남을지라도 그게 내 삶이다.
그래서 지금 나가면 돈을 더 준다는 말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남편을 따라 바이크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했다.
그리고 서울에 안녕을 고했다.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그렇게 나는 제주도 이주의 대유행이 사그라든 지 한참이 지난 2017년 여름, 서귀포로 이사했다.
우연은 아니다. 운명도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곳이다.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니 우리나라는 너무 작아서 서울이나 제주도나 그냥 작더라. 딱히 큰 세상에 산다고 삶이 커지는 건 아니다. 사람의 영역이란 건, 딱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합집합 정도. 아무리 집이 넓어도 좋아하는 공간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듯이,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집합보다 소중한 이와의 합집합이 중요하다.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서울에 두고 아는 이 하나 없이 서귀포로 내려왔다. 나와 그의 고향이 아닌 낯설고 아름다운 제주에서 철저한 이방인이다. 이사하기 전 미리 사귀어놓은 이도 없고 심지어 직장도 없다. 총알이 다 떨어질 때쯤이거나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 되면 일을 시작하겠지. 단순한 마음이었다.
이 곳은 섬이다. 무엇보다 지역적으로 강한 결속력이 있는 곳이다. 출신 대학, 좋은 경력은 쓰다 버릴 일 잘하는 실장급 정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지방에서 그것도 타향 사람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서울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곳은 너무 잘나도 배척받고 적당히 쓸만하면 쓰다 버리기 딱 좋은 그들만의 세상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생활 16년, 이제 겨우 서울살이가 내 인생의 반을 넘어섰다 싶은 순간 나는 다시 머나먼 타향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곳, 아마도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 관계 속에 나는 미숙할 것이다. 애써 감추려 하지 않겠다. 애써 버티지도 않겠다. 내 몸과 마음을 깎아 누군가의 틀에 맞추기엔 서귀포의 삶이 너무 아름답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기로 한 이상, 나는 좋은(=내가 감당할 만한) 일만 하겠다.
십 년 차인 나에겐 기본으로 적당한 더러움과 알량함, 좁은 이해심에 대한 무한 패치가 장착돼있다. 내 위치는 내가 결정한다. 나는 프로 직장인이다. 고로 프로페셔널하게 일하겠다.
서울은 대학교가 있었기에, 돈을 주는 회사가 있었기에 머물렀던 곳이다. 찬란하고 유치했던 젊은 내가 쌓아놓은 똥들이 골목길마다 가득하다. 어렸기에 아름다웠다. 적어도 내겐.
이제 삼십 대 후반의 나는 아름다운 낯선 동네 제주에 있다. 연륜 있는 내가 지금 똥을 싸면 그건 냄새나는 똥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더 잘할 것이다. 잘 안되도 어쩔 수 없지만 아무리 개똥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지혜롭고 우아한 김실장이 되겠다.
지혜롭게,
우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ps. 나는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직했다. 그리고 일 년을 보냈다. 이제 적당히 적응했구나 싶은데 코로나로 경기가 아주 바닥이다. 덕분에 휴업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밀렸던 글을 쓴다. 덕분에 월급은 없다. 덕분에 냉정하게 이 바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 글은 지난 일 년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