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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May 27. 2020

서로를 관찰할 때 지켜야 할 예의

이직자가 갖춰야 할 낮은 자세에 대하여.

직장인에게 신입사원은 평생 한 번뿐이지만 경력사원으로 입사하는 일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드디어  첫 번째 이직의 순간이 왔다. 모든 게 신선하다.( 마치 신입사원이 된 이 느낌은, 조금은 멍청해진 기분이다.) 이직자 = 나는 오랜 시절 알고 지낸 사람들 속으로 홀로 들어가야 한다. 아주 작은 회사라 다섯 손가락 안에 모두가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조금 더 조심스럽다.

 

첫 직장인 대기업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다. 신입으로 시작한 이가 우위에 있다. 이직 시 전 회사의 경력은 그 규모에 따라 반영된다. (매출액이나 규모에 따라 경력은 축소된다. 대기업의 횡포랄까. 사실 일다운 일은 작은 회사 출신일 수록 더 많이 하는데 말이다. ) 매년 경력직으로 입사하는 이들이 있었고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대우가 달랐다. 끌어주고 당겨주는 사람의 유무에 따라, 어떤 이는 모두와 금세 어울렸고 다른 이들 역시 그에게 익숙해졌다. 사실 막내일 땐 누가 들어와도 선배이니 상관없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연차가 경력직으로 들어오면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입사해서 꼬박꼬박 경력을 쌓은 나와 경력도 나이도 많지만 이직하며 나보다 낮은 연차로 들어온 이가 만나면 매우 어색했다. 학교에서 만났다면 하늘 같은 선배였겠지만 회사에서는 승진의 경쟁자이고, 심지어 조금은 내가 앞서있었으니. 불편했을 이직자들에게 나는 선배의 예우를 해주었다. 사실, 인생 선배지 않은가.


모든 이직자들에게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초짜 대리였을 때 사원이 없어 팀의 막내이기도 했던 시절, 프리랜서 (비정규직) 부실장이 합류했다. 이제야 일다운 일을 해보겠다며 벼르고 있던 내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모셔야 할 윗분이 늘었다. 당연히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경력도 길었다. 서로 통성명을 마치고 한 팀으로 열심히 해보자고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을 함께 하기 시작하자 그는 당연하게 나를 막내로 생각하고 일을 지시했다. 모셔야 할 윗 분에 그를 포함할지 말지 결정하지 못한 채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하라는 일만 했다. 말이 좋아 대리지 그냥 여기저기 도와주는 업무가 내가 할 일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간 불편한 마음을 최대한 숨기고 익숙한 막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은 불만이 되었고 일의 능률이 떨어졌다. 나는 진짜 대리가 되고 싶었다. 막내 말고. 결국 나는 그 사람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판단했다.


내게 많을 것을 알려줄 사람인가.

일처리가 빠릿빠릿하니 배울 만한 점이 있는 선배인가.


그리고 그냥 내 맘에 드는 사람인가.


슬프게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그가 나를 존중하거나 알려주거나 함께 일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냥 자기 일하는데 귀찮을 거 맡아줄 막내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이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 업무입니다. 부실장님.”

“이건 제가 할 테니, 그건 부실장님이 하시면 됩니다.”

“이 업무는 제 업무가 아닙니다.”

그는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린 게 텃세를 부린다며 이게 비정규직의 서러움이구나 싶은 씁쓸함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몇 번의 대화 끝에 나를 대리님이라고 불렀고 서로 각자의 일을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분은 다른 팀으로 갔다.


한참 후 다른 회사의 정규직으로 이직하며 그가 말했다.

 “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세상 일은 다 돌고 돌거든.”

내게 인생의 교훈을 주고 싶었나 보다.(지금 생각해보면 이 조언 역시 배려를 가장한 꼰대 짓이다. )


나는 팀에 새롭게 들어온 그를 관찰하고 판단했다. 사심 없이.

서로를 관찰하는 것,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해 주기 위한 팀워크를 만들어가는 첫 단추이다. 텃세를 부릴 위치에 있든, 굴러온 돌이 되어 박힌 돌을 처내야 하든 같은 회사에 고용된 직장인이다. 필요한 건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존중 관계이다. 워낙 많은 이들이 흘러들어 나갔던 천명 규모의 회사에선 그 관계가 대부분 직급에 의해 결정된다. 나이는 그리 중요치 않다. 제일 안타까웠던 경우는 경력이 엄청난데도 첫 시작이 고졸 사원이었던 이다. 그들은 나이가 적든 많든 승진에서 항상 밀렸으나 내겐 신입사원 시절 감사하게도 가장 많은 것들 가르쳐 주신 분들이다. 내가 승진을 하자 나보다 낮은 직급이 되었다. 축하해주는 선배님의 표정에 내가 더 슬펐다. 적어도 나는 그 회사에서 잘 나갔다. 제일 어린 실장이었으니까.


작은 회사는 어떨까. 긍정적 기대감은 아니다. 얼마나 열악할까. 어쩌면 생각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첫 이직, 구두로 약속받은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그 어떤 약속도 공수표다. 내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약속받은 것을 얻어내야 한다.

"안녕하세요. 김실장입니다."

나이 지긋한 선배와 알고 보니 친인척 관계인 실장이 나의 상사들이다.

"안녕, 수연 씨. 반가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의 후배가 생겼다.


서로에 대한 첫인상을 감춘 채 환한 미소로 서로 통성명을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선배는 일주일이 지나자 자신의 경력을 쏟아낸다. 그리고 내게 같이 일하는 사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에 대해 조언을 했다.

"김 실장 때문에 나도 존댓말을 쓰게 되네. 근데, 그럼 가르쳐 주기 좀 애매하지 않나. 까마득히 어린데."


연륜은 때론 독이다. 제주도라는 작은 리그에서 오래 머물렀다면 더욱 그렇다. 동등한 관계를 말하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이 작은 회사의 사람들을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호칭에 대해서부터 다름을 깨달았다. 나이가 어려도 존칭을 쓰는 건 내 사원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협력사 앞에서 마치 대학생 취급받던 사원 시절이 서러웠기에. 물론 그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완벽할 수 없어도 노력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나는 지금 이 회사에서 가장 낯선 이다. 내게 당연한 것들이 이 곳에선 당연하지 않고 이 회사에서 당연한 것들이 내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서히 물들어 가다 보면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애정이 좀 더 생기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게 받아들여질지는 내가 보여주는 능력, 그로 인해 회사가 내게 갖는 믿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잠시 나의 자존감을 내려놓기로 했다. 일단 믿음을 만들기 전까지 배울 것이다. 이 회사의 언어를. 그리고 판단할 것이다. 내가 이 회사에서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그다음 내 자존감을 인정받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판단하겠다. 그러니 지금은 제주도의 이 작은 회사의 시스템에 나를 맞춰볼 것이다. 십 년 차 직장인이 그것 하나 못하겠는가.(사실 그땐 몰랐다. 이렇게나 많은 것이 다를 줄은 ㅜ.ㅡ)


우리는 보통의 상식 속에 산다. 사람마다 이 '보통의 상식'이 다르다. 나는 내 보통을 잠시 잊을까 한다. 그게 내가 발을 들이기로 한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 가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면 더 나아가 다른 한 가지를 강요받게 될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내가 이 곳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자신들의 방법으로 살아남은 사람에게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려면 그게 얼마나 효율적이고 훌륭한지를 느끼게 하면 된다. 만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그 누구도 나로 인해 생겨나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기왕 한 배를 탔으니 그 상황까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


이직자로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익숙해지고 기존의 방식대로 일할 것이다. 나는 굴러들어 온 낯선 직장인=이직자 이니까. 

그리고 여긴 너무 아름다운 제주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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