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여행하는 자.
오전에는 지난번 납품했던 프로젝트 담당자의 전화가 왔다. 무려 3년 전 일이다. 공공건축의 문제점은 관리자와 설계자, 그리고 그들을 묶는 시스템이다. 누가 더 나쁘다 말할 수도 없고, 누가 더 잘한다 말할 수도 없다. 설계자의 입장에서 법적 책임을 떠나서 언젠가는 또 만날 공공기관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설계자의 온 마음을 다 바쳐 일을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관리자의 입김은 때론 배를 바다에서 건져 산으로 올린다. 그 상황에서 그나마 배가 부서지지 않게 만드는 게 설계자이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하면 관리자가 바뀐다. 다시 한번 도돌이표. 심지어 몇 년이 지난 후 이렇게 전화가 빗발치는 이유는 감사 때문이다. 감사를 맞이한 관리자는 이일의 처음과 중간, 끝 중에 아주 끝에 있는 누군가이다. 그러니 뭘 알겠는가. 기억을 헤집어 자세히 설명한다. 묻지 않아도, 혹은 궁금해하지 않아도 난 친절하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 아주 어리고 싹수가 없는 누군가의 전화도 감정 없이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겠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는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자, 누가 되어도 쉽지 않은 자리이다. 누군가는 맡아야 하는 자리인데, 이젠 너무 속속들이 알아서 측은하다. 나름 갑이라고 설계자에게 전화하는데 아는 건 없고, 무릎 끓어 빌고 싶지 않으니 더 대대 하게 굴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궁금하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가끔 한없이 착해지고 있을 때가 있지 않는가.
절대 갑이라고 부르기엔 그들이 사는 세상이 전혀 부럽지 않아서, 잘해주고 싶다. 어린 공무원들, 건축직 공무원들은 더 그렇다.
공공건축을 통해 마을을 꿈꾸고, 사람들의 일상이 풍부해지기를 바란다. 공공건축이 필요한 이유도 지방에 내려와 살아보니 피부로 느껴진다. 서울, 수도권처럼 뭐든지 꽉 찬 도심에선 돈이 있든 없든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인구 대비, 땅 면적 대비 많은 것들이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지방은 낮은 인구 밀도 탓에 이젠 슈퍼하나 동네에 없는 곳이 많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 도서 산간 지역으로 묶인 지역에 사시는 걸 보면 공공건축의 빈 틈이 많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공공건축의 기획과 실행, 그리고 활용까지도 정치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그렇다고 좌절해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에 들어온 건축물이 있다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 되길 바란다. 무시해도 될만한 발주처의 말 한마디도 다시 한번 고민하고, 건축가의 자아가 디자인을 고집하는 데 활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건물 이쁘다고 사람들의 이용이 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 건축가들은 항상 외관에 집중한다. 첫인상, 준공사진 뭐, 그런 것들이 잘 지었네, 잘 나왔네, 등으로 평가된다. 실제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관보다는 동선이 중요하고 기획서의 면적이 아닌 본인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공간이 더 많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미친 듯이 준공 후에 민원을 넣는다. 준공 후의 민원이 설계자에게 들려오게 되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때로는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벌어진 경우도 있다. 그래서 발주처에게 누누이 경고했지만, 결정권이 없는 건 관리자나 설계자나 매한가지다. 때로는 문서에 적혀있는 이미 결정된 것들을 바꿀 수 없을 경우가 있고, 책임질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은 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니 눈을 감는 것이다.
오래된 프로젝트가 지방 신문의 작은 기사가 되어 행사가 열린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때면 흐뭇하다. 비록, 건축가의 꿈과 희망을 펼치지 못했지만 공공건축의 존재의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게 맞다.
그래서 디자인의 의도를 중하게 생각하는 소장과 나는 매번 의견이 다르다. 보기 싫은 건축물보다 이용자가 불만이 생기는 건축물이 더 싫은 나와 초기 디자인을 구현하고 싶은 원작자 사이의 묘한 기류. 누가 맞을까. 정답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 토론의 장에 이용자가 배제되는 건 시스템의 문제이다. 가끔 생각한다.
주민들이 만드는 공간이라…… 음 , 그리고 그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라니, 너무 쿨하다.
듣기엔 좋지만 막상 내가 그 건축가가 된다 생각하니 아득하다. 늘어만 가는 설계기간에 실행은 빵꾸날 것이고 아무도 결정하지 않아서 프로젝트는 산으로 산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다 예산이 해를 넘겨서 불용되면 그냥 망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 문화를 생각해 보면 목소리 큰 자가 우두머리가 되고, 대부분 나서기를 주저한다. 시골 마을 이장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동네 어르신들이 그냥 참는 이유가 그런 거다. 공동체를 만드는 기본적인 소통의 문화, 배려와 평등 기타 등등 모든 수준이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다. 교육열이 높을수록 영악한 이들이 많아서 문제이고, 후진 동네일수록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
핑계와 변명에 불과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설계자가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해도 구현할 길이 없다. 그게 우리 공공건축 시스템이다.
공동체를 바라보는 공공기관의 의식도 큰 문제이다. 민원을 귀찮아하면서도 무서워한다. 최대한 문제없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중을 긴 호흡을 가지고 대응할만한 여유가 없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가 그 자리에 들어올 것임을 알기에, 때로는 뭉갠다. 누군가가 똥을 치울 거라 생각하며. 그리고 관리자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 있다. 바로 설계자와 시공자. 내가 설계자이기 때문에 나의 시선이 어느 정도는 기울어져 바라보는 것임을 감안해도, 불공정한 경우가 많다. 건축가협회, 새 건축사, 뭐 이런저런 단체들이 있지만 모두 건축사라는 자격증을 딴 자들만의 리그이다. 본질적인 건축계의 문제를 해결할 마음도 없고, 그저 어딘가에 놓여 있는 시장의 파이를 기왕이면 내가 먹기 편하게 만들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만일 내가 건축사 자격증을 서른 즈음하여 따고, 고향에 내려와 설계사무소를 차렸다면 그들과 달랐을까.
생존 앞에 장사 없다.
건축이 제일 재밌는 직업이다. 그 안에 얽힌 실타래가 불공정과 경쟁으로 엉켜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공공건축계의 무수히 많은 문제들도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설계자가 전부인 것이다. 좀 더 좋은 공간을 향해 밤을 새워야 하고, 지방의 작은 건설사의 시공 능력과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 감리자를 감안하여 무난한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무너지면 좋은 공간이 될 수 있는 어떤 공간이 그저 쓰레기인 세금낭비가 되는 것이다.
돈을 받고 일하는 자들 중에 이렇게 마지막 보루가 되는 직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유명한 대학교 교수가 되고, 이름 꽤나 알리는 건축가가 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기왕이면 필드에서 끝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가며 실제 지어지는 건축물을 만드는 설계자가 되는 것도 멋진 일이다.
좋은 설계, 건축가가 많이 있다면 관리자, 시스템 따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설계를 하는게 좋다.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건축쟁이가 있다면 외로워 하지 말자. 우리 같은 건축가가 이어진다면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지 않겠는가.
공공건축에 투자되는 예산들이 삭감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너무 춥고 힘든 시기다.
우리 모두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 하자.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