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는 꽃이 많다.
계절마다 피는 꽃이 제각각이라 어느 날 문득 꽃이 보고 싶어 문 밖을 나서 산책하다 보면 어느 꽃이든 만나게 된다.
눈이 오늘 어느 겨울날에는 그렇게도 예쁘던 동백꽃이 이제 지고 있다.
서귀포는 온도가 낮아 눈이 쌓이질 않는데 이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려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눈사이로 초록의 잎이 빠알간 동백꽃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예전에 엄마가 그랬다. 나이 들수록 꽃이 그렇게 좋아진다라고, 평생 꽃다발 따위 돈낭비라 생각했다는 그분이 꽃이 좋아서 이젠 계절마다 꽃구경을 다니신다.
제주도로 내려올 때만 해도 그저 꽃이네. 였던 나도 계절마다 어느 곳에 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겨울엔 동백이 봄에는 유채와 민들레, 벚꽃이 있다. 여름 넘어갈 때쯔음 수국이 그리고 가을엔 꽃보다 아름다운 억새가 있다.
서울에 살 땐 어딘가를 여행 가기 위해서 수도권을 벗어나기까지 넉넉하게 2시간을 잡았다. 밀리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 캄캄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에서 해를 맞이하게 된다.
서귀포에 살면 게으른 아침을 보내고 그저 십 분이면 동네 어디듯 그렇게 꽃이 널려 있다.
날씨가 예전 같지 않아 미세먼지가 잔뜩인 날들이 많아져 슬프긴 하지만 미세먼지가 시작되며 꽃이 한창인 봄이 오면 하루만은 선명해지는 날이 있다.
하늘이 속삭인다. 오늘이야. 얼른 나가서 뛰어!
벚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하고 유채꽃이 한창인 봄날,
나름 사람 적은 곳을 고른다고 골라서 예래동으로 향했다. 더운 여름날 가장 사랑하는 물놀이 장소인 논짓물과 닿아있는 공원이다.
제주는 개발정책은 엉망이다. 불행의 시작은 서민의 땅을 갈취해서 만든 중문단지부터였을까. 비자장사를 위한 중국자본 개발사업부터였을까. 아님 중산간 지천에 깔린 골프장 때문일까.
여기저기 온갖 곳이 개발이다. 그래서 이제 와서 보존을 외친다 하지만 보존할 곳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한라산 정도랄까.
중산간 아래로 마을이 들어선 어느 곳이든 관광지화가 되어버렸다. 동네에 맛집 한두 개 생겼다 사라지면 그 주변이 황폐해진다. 차라리 맛집이 없었더라면 그저 시골길 이었을 곳이 맛집을 핑계로 우후 죽순 생겨난 식당들로 북적이다가 어느새 인기를 다른 곳에 빼앗겨 임대 푯말이 붙은 멋대가리 없는 근린생활 시설의 무덤이 되어버린다.
예래동은 그것보다 심각하다. TF 만들어 개발의 붐이 한창이던 20년 전에 시작된 프로젝트는 도지사가 몇 번이 바뀌어도 골조만이 남은 채 풍경 좋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그 흉물은 하필 계곡처럼 생성된 습지와 자연천이 내려와 바다와 만나는 곳을 옆에 끼고 있는데 그게 바로 예래생태공원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데리고 공원을 찾는다.
자연석을 잘 쌓아 올린 인위적인 골짜기이지만 제법 자연스럽다. 물이 졸졸 흘러 바다까지 향하는 여정을 따라서 데크와 습지, 갖가지 식물들이 심겨 있다. 그늘이 없어 힘들 때쯤에 벚꽃길이 시작된다. 덤으로 유채꽃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다. 길 끝에는 족욕장도 있다. 작년 부모님을 모시고 왔을 때, 아무도 없는 공원길을 따라 족욕까지 했었는데, 별거 아닌 그 공원을 부모님은 참 좋아하셨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마을 회관 같은 건데, 어르신들의 소망 중 하나가 족욕장이란다.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이 떠올라 더 좋은 족욕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아직은 벚꽃이 꽉 차오르진 않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가볍게 뛰어본다. 모두들 사진 찍기 바쁜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춥다. 삼 심분, 3킬로 정도 달리자 바다가 나온다. 바다와 천이 만나는 곳에 유채꽃이 깔려 있다. 바닷길을 따라 조금 더 뛰어본다. 저 끝에 영화 마녀를 찍었다는 카페가 있다. 처음엔 두채 정도였던 거 같은데 장사가 잘되는지 매번 건물이 늘어난 느낌이다. 그 아래 아담한 카페는 문을 자주 닫는다. 아담한 카페의 장사 걱정이 된다. 누가 와서 여기서 커피를 마실까. 제주도의 카페는 핫한 신상의 대형프랜차이즈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봤을 제주도 가서 카페나 차려볼까는 허상이라는 걸 오래 살아보니 알겠다.
그래도 한 이년 정도 꿈과 낭만을 품은 채 바다를 보며 카페 주인장을 해보는 건 아름다울 것 같다. 누군가는 투자 실패라고 하겠지만 그 역시도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돈을 조금 벌고 마음이 아름다울 수 있는 시간일 수도 있을 테니.
한라산 아래 흉물이 되어버린 예래유양형 주거단지가 보인다. 아깝다. 산아래 멈춰버린 저 땅이, 있는 그대로 공원과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언덕을 찍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간다. 바다를 흘낏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에 자리를 비켜주며 다시 공원으로 들어선다. 주차장부터 공원, 바다까지 총 6.5킬로 정도이다.
오늘은 하늘이 속삭여준 선명한 날이다. 구름도 없고 먼지도 개인 서귀포의 봄날은 무엇을 해도 아름답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전이 다 갔다.
제주도에 내려온 지 이 년 정도는 한 달에 한번 제주도를 한 바퀴씩 돌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구석구석을 모두 점령하고 싶었다. 이년이 지나니 이도저도 다 시들하고 한라산이 좋았다. 산을 타야겠다. 싶어 한 달에 한번 둘레길과 한라산을 갔다. 그러다 지금은 그저 동네를 머문다. 내 골목길, 내 정원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이렇게 선명한 날에는 조금 더 멀리 나가본다. 지천에 꽃이고 사람이 가득한 공원도 좋고, 매번 보는 바다도 좋다. 무엇보다 선명한 하늘과 공기가 제일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지 못했던 일들이 아쉬워진다. 내가 그때, 만약에 그랬더라면 뭐 그런 것들.
오늘 같은 날엔 내 삶에 확신이 강해진다. 무슨 일이 생겼더라도 돌고 돌아 결국 난 오늘 이 자리에 있을 거라는 확신. 지금 나의 삶이 아주 선명해진다. 이건 다 날씨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