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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바다

by NanA


제주에 내려온 지 꽉 찬 8년을 향해 달려간다.

정확히는 서귀포.

일산 신도시의 작은 버전 같은 제주시가 아닌, 내가 나고 자란 전주의 작은 동네 정도되는 서귀포.

있을 건 다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 이마트, 맥도널드, 스타벅스, 맛있는 빵집, 스타일 있게 머리카락 자르는 미용실.

서울의 대도시의 16년이 아쉽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이사를 자주 한다. 아직은 정착의 용기가 없는 걸까. 그저 사정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지만, 나는 안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지금은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이다.

제주 방언이 전혀 들리지 않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여럿 거치고 이제 작은 해안가 동네에 산다.


제일 높은 건물이 4층인 높이제한이 있는 마을이다.

눈을 들면 낮게 깔린 건축물 위로 하늘이 보이는 게 아름답다.

아침에 눈을 찌르는 해를 보려고 창문을 열면 온갖 새들이 노래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인사를 건넨다.


첫 정착을 20층짜리 아파트 4층에서 시작했다. 빼꼼히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넓은 바다. 그 바다에도 숨통이 트였다.

창문너머로 노을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지만 내 눈 안에 담기엔 충분했다.

그러다 18층의 옆 아파트로 갔다. 마찬가지로 먼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곳이었다.


도시에 살다가 바다를 만나면 그 해방감이 여행의 맛이다.

바다 근처에 살며 만나는 먼바다는 일상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바다를 만지고 싶어졌다.

더 가까운 아파트 단지로 연세를 옮겨가는 동안, 제주도의 집값이 2배 정도 뛰었다.


그 돈이면 하나 사지 그래? 스스로에게도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집이 생기면 이제 거기서 죽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정착이 먼 얘기 같다.

계약이 끝날 때쯤엔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어느 빌라에 갈까? 어느 아파트로 갈까?

대단지 아파트의 연세값이 단독주택만큼 뛰어버리자, 차라리 단독주택이 낫겠다 싶은데, 아직 주택을 갈 용기가 없다.


망설이다 보면, 고민하다 보면 길이 보인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골목길을 헤매다 만나기도 하고, 그냥 무심코 웹사이트를 뒤졌는데 나타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걱정 없는 인생을 선택하니 때가 되면 뭐든 나타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인생이 항상 그러했는데 욕심과 여유 없는 마음 때문에 못 봤던 걸 수도 있고,


그렇게 반년 전에 다시 이사를 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서 대로의 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미친 듯이 새들이 지저귀는 40세대의 임대주택이다.

무릎이 나갈 거 같은 계단으로 작은 방들이 수직적으로 모여있는 혁신적인 설계안( 수도권에서는 근교에서 이미 많이 지어졌고, 유행을 탔다가 금세 사라진)이란다.

이런 구성으로 서귀포에 집을 짓다니! 개발사의 혜안에 뭔지 모를 경외감이 드는 건, 그럼에도 지어내었다는 결과 때문이다. 아마도 지방에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수도권 개발사 같다.


어찌 되었든 나는 매번 순간의 바다를 만지는 조용한 공동주택을 찾았다.

내 주머니의 돈이 월세로 나가는 만큼 미친 새들과의 조우는 매일 아침 음악이 되어주고, 옥탑방은 나의 사무실이 되었다.

한참을 줌으로 당겨야 만져지던 바다였다. 이제는 고개를 돌리면 그 바다가 만져진다.

서귀포에 이사 온 이래로 한결같은 한라산은 4층이건 18층이건 매한가지이다.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습한 어느 날이면 파도의 입자들이 바람 타고 들어온다.


쾌적함보다는 그 끈적이는 소금기가 가끔은 좋은 날도 있으니, 불평할 수는 없다.


최근에 읽은 어느 건축가의 소설의 서문에 가장 위대한 건축 중 하나를 하늘이라 쓴 걸 보았다. 정확한 워딩은 아닐지 모르겠다.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을 누군가의 글을 통해 보니 확신이 생겼다. 대도시든 서귀포 어느 바닷가 근처 동네든 똑같은 하늘아래 있는 것일진대 나는 왜 이제야 이 것들을 들여다보게 되는 걸까. 그때의 내 어린 나이, 모두가 바라보던 성공과 부를 향한 나의 욕망,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운 사람들의 근사한 삶의 모습에 자꾸만 조급해졌던 열등감. 어느 정도 가지고 나서야, 더 가실 수 없음을 알고 나서야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나는 도시에 내가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어디까지 올라갔을까. 몇 억짜리 집에 살고, 어디에 투자를 하며, 늦은 밤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가 궁금하다.


마음은 구름처럼 가벼워서 그 둥실 거림을 따라 만약이라는 인생을 그리다가도 저기서 불어오는 밤바다의 매서운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다. 그랬지. 시간은 흘렀고, 나는 선택을 했고, 행복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없는 건가 보다.


순간의 바다를 만질 때마다 대충 이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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