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모든 게 좋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작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가 있었다.
그 작은 것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한번 웃고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문득 얼마나 나를 오랜 시간 바라봤기에 그걸 알아챘을까. 싶어 고마웠다.
인생에 있어 사랑은 여러 가지 종목이 있다. 이십 대의 풋사랑, 삼십 대의 계산적인 인간관계 속의 이웃과 친구들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은 상대적인 거라 내가 노력한다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했으나 그것만으론 인생을 함께 하기 힘들다. 온 우주가 함께 기도해야 되는 것이 사랑이고, 결혼이라고, 가정이다.
그나마 그 맹목적인 사랑이 결실을 맺는 건 학창 시절엔 공부였고, 시험이었다. 대학을 가고 직장에 입사하는 모든 것들은 약간의 운과 노력이다. 아무리 바늘구멍이라도 인생을 걸고 도전했을 땐 뭐라고 건져 올렸다. 그게 20년 전의 이야기니까, 지금은 좀 더 빠뜻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때만 해도 설계회사에 들어간다는 건 건축에 대한 열정이 필요했다. 보험이니 야근수당,휴가니 하는 것들은 사치였다. 그래서였을까. 누가 월급 더 많이 주냐 보다는 이름 있는 건축가사무실이 더 인기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건축은 도제시스템이었다. 대학은 그저 대학일 뿐, 졸업은 실제 업무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빼먹고 그저 세상에 내보내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건축학과의 오 년제가 최초로 도입된 해의 입학생이다. 나름 달라진 커리큘럼이라고 했다. 회사에 와서 어쩌면 내가 배웠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타공종과 적산에 대한 기본적인 수업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좀 더 열심히 배워뒀다면 회사생활이 좀 더 쉬웠을지도. 그러나 나는 어렸고, 건축을 몰랐고, 학점 2점짜리의 전공수업보다 6점짜리 설계수업에 더 열심이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은 총량제이다. 어딘가엔 바닥이 있다. 대학생 시절 미친 듯이 설계만 했던 탑에 있던 친구들은 졸업하며 유학을 가거나 전공을 빠꿨다. 가장 인상 깊었던 친구는 편입을 했다. 가장 입학성적이 좋았던 수석도 그랬다. 유학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저 작은 바람에 불과했고, 적당한 성적은 설계수업점수가 아닌 다른 교양들이 밀어 올려준 덕분이었던 나는 건설회사에 가려고 했었다. 덜컥 대형설계회사에 입사를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초반의 적당한 질주 덕분이었을까. 나는 회사생활에서 건축이 더 좋아졌다.
이제 곧 이십 년이다. (많이 남긴 했다. 그래도 올림 하면 이십이니까.)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 자세히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 알아야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건축시장은 얼어붙었고, 이제 더 이상 대규모의 개발사업이나 국가사업이 없을 것이다. 대형설계사무소야 어떻게든 먹고 살 것이다. 1군 건설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는 누군가가 설계를 해야 할 것이고, 그들만의 시장을 개발할 것이다. 작은 설계 사무실들, 개인건축주를 만나고 국가사업에 기댈 수밖에 없는 규모의 회사들은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자세히 들여다 보아 작은 것들마저도 사랑했던 나의 애정만으론 회사가 굴러가지 않기에 대표의 어깨에 얹힌 무거운 짐이 언젠가는 내게도 드리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가혹한 것이다. 때로는 인생의 전부를 다 가져다 바칠 수 있고 내 모든 순간의 기쁨의 원천이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항상 수반되지 않는다.
나만 알고 있는 오른쪽 세 번째 속눈썹이 가장 예쁘다는 것도 소용없다. 사랑보다 돈을 좇아 떠나가는 경우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사람도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사랑이라 부르기 애매한 인생의 어느 부분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낸 순간이 오면 그땐 후련할까. 슬플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길 그렇게 잘했던 나인데 이십 년을 쏟아부은 이 오랜 사랑이 끝나면 뒤돌아설 수 있을까.
건축가는 40부터라는 얘기를 들어왔다. 이제 내 나이 40을 넘어서고 있다. 나의 오랜 사랑은 누구 못지않게 지고지순했는데, 사랑이니까. 노력으로는 안 되는 것을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