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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Feb 23.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1)


 익숙지 않은 장소를 구경하는 게 여행의 참맛이라지만, 긴 시간 지나 이미 누볐던 터를 다시 들르는 일도 나름의 쏠쏠한 재미가 있다.    

  

 손발이 작던 시절, 명절이 되어 달력에 빨간 칠이 될 때면 꼭 한 번은 배를 탔다. 방학을 핑계 삼아 선심 쓰듯 한 번 정도 더 들렀던 외할머니댁은 집채만 한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는 섬마을에 있었다. 기억이 남아있던 순간부터 되짚으니 물 위로 숨구멍을 내민 커다란 고래처럼 물가에 닿아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여객선이 먼저 떠오른다. 크기에 압도될 법도 했지만, 매번 타던 놈이라 어린 날에도 제법 익숙한 태로 배에 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두 발이 아닌 타고 온 승용차 안에서 고대로 갑판으로 옮겨졌는데, 참으로 멋지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들은 이런 아찔한 경험을 해봤을까 으스대며 섬에 사는 할머니를 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에 취해 빼꼼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턱을 쳐들어 마음껏 우쭐거리곤 했다. 배 입구에 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빈틈없이 열을 맞춰 빽빽하게 몸을 맞댄 차에서 내려 곧장 이층 선상으로 향한다. 몸이 작았으니 행동도 누구보다 빠를 터. 짠 바닷바람과 끈적한 바닷물에 칠이 벗겨진 녹슨 손잡이를 꽉 붙들고는 어린아이에게 절대 친절하지 않던 단이 제법 높은 철제 계단을 조심스레 올랐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어린이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강한 바닷바람이 들이쳐도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틀림없이 도달해야 했다. 체구가 작은 만큼 배포도 작은지라 고사리손으로 난간을 꽉 쥐고, 옆에 선 아빠의 바짓가랑이도 함께 붙들고는 육지와 멀어지는 장대한 광경을 눈을 떼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엔진 소리에 작은 아이의 함성은 들리지도 않았지만, 배의 꽁무니가 만들어내는 수면 위 하얀 거품을 보며 연신 탄성을 질렀던 것 같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에 달려드는 갈매기 떼도 매번 반가운 길동무. 어린 날, 큰 배를 탄다는 건 뜨거운 볕에 피부가 까매진 외할머니를 만나러 섬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물을 건넜으니 섬이구나 여겼을 뿐, 낮은 눈엔 발을 내디딘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할 도리는 없다. 나고 자란 부산에서도 가까이 바다를 두고 지냈으니 사면이 물로 가득한 할머니의 섬이 달리 보일 리도 없었다. 되려 도시 소녀에게 섬 생활은 불편함과 고단함이 우선. 선택할 거리가 적은 슈퍼는 한참을 걸어가야 했고, 화장실은 쪼그려 앉아야만 일을 볼 수 있었다. 책에서나 봤던 나무 문살에 종이가 발린 자그마한 문이 달린 할머니의 소박한 집은 여러모로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궁이 조절에 실패한 탓에 방바닥은 까맣게 그을려 있고, 마루 구석엔 뚜껑 속이 궁금하지 않은 철제 요강 단지가 새침한 소녀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편치 않은 환경에 긴장했던지, 사방이 어두운 밤이 되어 잠자리에 몸을 뉠 때면 작은 가슴은 조그만 풀 벌레 소리에도 놀라 요란하게도 콩닥거렸다.      

 그런데도 날이 밝아지면 단순했던 천진함은 지난밤을 잊은 채 나름의 재미를 찾아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는데, 할머니 집에서 몇 발 떨어지지 않은 마을 우물이 모든 것을 상쇄할만한 짜릿한 발견이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아래가 내려다보이던 깊은 동굴은 돌멩이를 던지는 방법으로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한참을 굵은 밧줄이 묶인 물동이를 내리쳐 물을 길어보겠다 씨름하고는 몸채만 한 양철 물동이를 가득 채워 간신히 어깨에 메고 와 쓸 일 없는 차가운 지하수를 할머니 집 마당에 때려 붓는 쾌락으로 한나절을 보낸다. 육신의 고됨 따위가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주워 모은 돌덩이로 얼기설기 낮게 쌓아 올린 돌담 덕에 안과 밖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던 할머니 집 마당에는 소녀의 유일한 섬마을 친구가 있다. 모든 것이 새카매 표정조차 읽기 힘든 흑염소가 여럿. 괜스레 오가며 녀석들을 잔뜩 약 올리고는 혼자 키득거린다. 가끔은 떼로 덤벼들까 봐 마음 졸이기도 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어린 날에는 하나뿐인 말동무를 그대로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주로 듣기만 했지만, 녀석도 가끔은 ‘메---에에’하고 대꾸를 해 지루한 하루의 위안이 됐다. 염소들은 자신만큼 까만 똥을 이리저리 흩뿌리고 다녔는데, 왜인지 여름이 지나면 한 마리씩 수가 줄어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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