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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Feb 27.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4)


 지나간 시간과 지금의 시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나. 한참 배를 타고 들어간 것 같은데 도착이 금방이다. 기억의 어딘가에 고이 접혀있던 모습들이 하나둘 눈앞에 펼쳐진다. 섬은 생각보다 잘 차려입고 있어 관광객이 늘어난 덕인지 번듯한 마을 안내판과 숙박업소들도 눈에 띄었다. 난 사람들만 들락거리던 섬이 이제는 제법 손님을 맞아본 행세를 하니, 모습이 변한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서먹하다. 곧장 골목으로 들어가 이모 집을 찾는다. 의심 없이 열린 대문과 똑같이 열려있는 현관문. 아직도 이리 살 수 있나 놀랍도록 서로 간 믿음이 두텁다. 집을 비운 이모를 찾을 생각도 없이 엄마는 짐을 두고 얼른 나가자 재촉한다. 조용하고 낮은 동네에서 고민할 새 없이 항 근처에 덩그러니 세워진 버스 쪽으로 등을 떠민다. 두 대의 버스. 무엇이 다른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엄마는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가 발을 올렸다.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는 버스 요금통의 당당한 문구가 바닷가 사람의 기개를 느끼게 해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아마 다른 곳에서 그와 같은 배짱을 만났다면 불쾌했을지도 모르나 왠지 쉬이 이해가 가는 게 나름 이곳에 애정이 있긴 있나 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버스 하나는 상도를, 하나는 하도를 향하는 다른 경로는 가진단다. 사량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상도의 지리산을 오르는 목적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타는 버스를 구별한다면 헷갈릴 일은 없겠다.     


 도심 버스처럼 뒤따라 경적을 울려대는 차도, 정체된 구간도 없이 유유히 서 있던 버스는 제 나름의 시간에 시동을 건다. 기왕 찾은 장소니 마을버스 대신 제대로 된 관광을 하면 좋겠다 잠시 불평을 가지다가도, 자주 왔던 이곳을 거창히 여기지 못해 금세 포기하고 만다. 대단한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지 않는 낮은 기대로 출발.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안에는 고작 세 명이 앉았다. 기사님은 익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니, 차량은 크게 기합을 한 번 부리고는 바퀴를 굴린다. 마을버스라는 게 가봤자 얼마나 가겠나 여긴 짧은 생각을 탓하라. 좁은 길 넓은 길, 굽이진 산길 가리지 않고 섬 전체를 꼼꼼히도 누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을 지나 곁으로 광활히 펼쳐진 바닷가를 열심히 질주한다. 요란한 소리와 달리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는 운전 솜씨로 버스는 평온하다. 바깥공기가 궁금해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창문을 열었다. 꽤 높은 지대를 지나고 있는 듯 멀리 낮게 바다가 보인다. 감사하게 좋은 날을 만나 눈이 부시게 내리쏟는 햇살이 빽빽한 숲을 통과하며 여러 갈래로 부서져 떨어진다.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녹색 잎의 움직임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다.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 덕분에 멋없이 달리는 버스 길이 한정 없이 오래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파란 바다와 탄탄히 다져진 흙길, 건강하게 뿌리내린 나무가 끝없이 반복되고, 옆자리 엄마도 쾌속이 달리는 버스처럼 신이 나 일일 해설을 자처하고 나섰다. 여긴 누가 살았었고, 저긴 예전에 무엇이 있었다는 과거형 설명이며 지극히 개인사에 따른 이야기들이지만 누구보다 애정이 묻어 나름 들을만하다. 창밖 모든 것이 찬란하여 종착지를 알릴까 벌써 조급해진다. 할머니의 섬이 이리 아름다운 곳이었나. 취향이 변한 건지, 섬이 변한 건지 왜 진작 자주 찾지 않았나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오감을 채우는 모든 것이 여행자의 입맛에 맞다. 번잡한 때를 피해왔으니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아쉬움으로 종착지에 다다르고 엄마와 이견없이 떠나기 전 한 번 더 버스를 타겠다 약속한다. 관광버스를 탔다면 좀 더 오래 누볐을지 몰라도 아쉬운 맛이 또 매력 아닌가. 이제 어디로 갈까. 말만 여행이지, 엄마도 본인이 자란 동네를 외지 사람처럼 돌아다니기가 짐짓 어색한 모양이다. 뭐 특별한 게 필요한가. 이미 상도행 버스에서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꼈기에 그저 동네를 한 바퀴 걸어보자 뜻을 맞췄다. 어차피 힘없는 딸과 함께라 빡빡한 일정도 무리일 테니 너그러이 즐기기로 한다. 꽃이 만발에 피어 중년 여성은 여느 또래 그들처럼 봄꽃을 친구 삼아 꾸준히도 사진을 찍어달라 딸을 조르고 있다. 아픈 모습을 담고 싶지 않아 찍히는 대신 찍어주는 역할을 도맡는다. 사진기 속 엄마의 미소. 이리 가까이 붙어보니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선명하게 핀 꽃 속에 묻힌 엄마의 생기 어린 웃음이 정말로 보기가 좋다. 길가에 아무렇게 볕을 받고 있는 마늘도, 섬에서는 특별한 일도 아닐 길가에 말라버린 바다 생명도 뭍에서 온 이에게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어릴 적에 봤던 것과 위치는 달랐지만 이제는 말라버린 우물도 하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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