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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Mar 08. 2022

어린날의 섬, 사량도(5)



 엄마는 골똘히 생각하다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한다. 어릴 적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사실 그때는 명확히 누군지도 모른 채 따라다녔다. 자주 만나질 못하니 친가 쪽 가계도는 쉬이 그려지는데 외가 쪽은 영 맹탕이다.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와 직접 배를 몰고 나가 바다 한가운데서 수영을 했던 나름의 추억이 있기에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아릿하게 기억이 살아 다행이다. 엄마도 제법 골목이 헷갈려 이 집 저 집 기웃대다 넘겨짚은 어느 집 대문을 밀어 본다. 인기척에 노쇠하신 할머니가 나오시고 한참을 헤아리시고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셨다. 찾는 이가 드물어서일까, 반가움에 두 손을 꼭 잡으시고는 엄마를 집 안으로 들인다. 한낮임에도 캄캄한 불 꺼진 집 안에 할아버지가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 있다. 누가 왔는지 눈보다 들어 알아채기가 빠른 듯, 할아버지는 소리 높여 전해주는 할머니의 목청에 그제야 엄마를 반겨 맞아주셨다. 기억이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 중이라는 할아버지. 멋진 흰 수염에 새까맣고 다부진 몸집으로 뱃머리를 잡던 예전의 모습이 겹쳐 괜히 마음이 서운하다. 당장 거동도 힘들어 보이시기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염려해 힘 있게 붙잡지도 못하는 두 분을 뒤로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이를 한참 먹은 손녀에게 용돈을 쥐여주시는 거친 손을 뿌리치며 겨우 밖으로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생기를 더하는 섬에서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홀로 차분히 흐려져 가고 있었다.      


 왠지 헛헛만 마음에 이리저리 동네를 전전하다 이모 집으로 돌아온다. 동네 반장을 자처한 이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아 주인이 올 때까지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아무리 자매라도 조심스러울 만도 한데 엄마는 제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거실 오른편 주방은 생명이 오래되어 요즘 보기 힘든 옛 물건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이래저래 관심을 보이니 엄마는 망설임 없이 뭐든 가져도 된다 허한다. 어째 주인도 아닌데 인심이 후하니 즐겁다. 저녁 무렵 돌아온 이모는 기억 속 모습보다 더 까만 얼굴로 모녀를 반긴다. 함께 오신 이모부는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나가 손수 잡아 오신 생선을 회 쳐주셨으나 이모로부터 아픈 애가 날것을 어찌 먹느냐 밥상머리에서 신나게 타박만 들으신다. 하루를 버려 애써 잡아 온 실한 놈들이니 억울할 만도 한데 이모부는 묵묵히 밥숟갈만 삼킨다. 오랜만에 들른 처제와 조카 앞에서 면을 구기셨으나 늘 있던 일인 양 조용히 식사만 하시는 모습이 왠지 정겹다. 엄마가 아빠를 다루는 솜씨와 몹시 흡사해 두 사람이 참으로 자매란 확신이 든다. 저녁은 김치에 흰밥만인데도 배가 부르더라.     


 늦게 잠드는 도시와는 달리 섬마을은 일찍 불이 꺼진다. 누가 전원이라도 꺼버린 듯 이모와 이모부는 조용히 잠자리에 드셨고, 평소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엄마마저도 나름의 일정이 고됐는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일찍 마무리된 하루만큼 먼저 내일을 시작하겠지. 아직도 섬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만 떠오르는 주제 없는 생각들로 뒤척이다 잠이 든다. 까탈 부리던 소녀는 변함없이 고대로 자랐기에 이부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으므로 눈을 감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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