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정확한 수사가 아니다. 강산이 변하는 것만큼이나 획기적인 변화가 자고 깨면 생겨난다. 오랜 친구 혹은 선후배와 얘기 나눌 때엔 20년, 30년 전의 과거를 엊그제 일처럼 말하곤 하는데, 현재의 삶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으니, 은근 넌센스다. 변화가 빠르고 그 폭도 깊고 넓어서 자주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종종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인식이 뜻밖의 경험으로 왕창 부서지곤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사이렌:불의 섬>(이하 <사이렌>) 첫 회를 보면서 정말로 소름이 돋았다. <사이렌>은 경찰, 소방관, 경호원, 군인, 운동선수, 스턴트 배우, 여섯 직업군의 여성 4명이 각각 팀을 이뤄 섬에서 생존 경쟁을 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4명씩 여섯 팀이니 총 24명의 여성이 출연하는데….
출연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너무 놀랐다.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강인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도 압도적이었다. 강인함, 유연함, 날렵함 등을 갖춘 여성들에게 완전히 매혹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혼란스러웠다. 어떤 지점이었을까, 나의 혼란은. 내가 반한 어떤 지점들을 이전에는 여성에게서 거의 느껴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사이렌>을 보고 나서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아름다움이 매우 협소하고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몇 해 전이었다. 딸아이가 대학 2학년 무렵이었을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나와 딸은 꽤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이슈였다. 나름 진보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딸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의 얘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여성적’ ‘남성적’이란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그럼 그 말로 분류되는 특성들을 개념화하려면 어떤 말을 써야 해? 이건 거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돼야 하는 거 아냐?’
2017년 무렵이니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그때의 얘기를 할 때마다 딸은, 자신이 좀 덜 성숙했다고 말하고,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내가 너무 무식했다고 말한다. 서로 반성하는 지점이 좀 다르긴 하지만, 우리 둘의 간극은 얼추 사라졌다.
함께 <사이렌>을 함께 보면서 그때 일이 떠올랐다. 아, 이거였구나.
참가자들은 모두 패기 넘치고, 강인하며, 전략적이고, 최강의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장작 패는 미션에서 탁월하게 성과를 낸 소방관팀 정민선과 운동팀 김성연의 힘과 투지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웠다. 이들이 보여준 이 강력한 특성들을 일반적으로 ‘남성적’이라고 표현할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이 정민선, 김성연만큼 강인하지 못할 게 뻔한데, 이 특성들을 ‘남성적’이라고 개념화하는 게 맞는 걸까?
반대로 부드럽고, 섬세하며, 감성적인 면들을 ‘여성적’이라고 부른다. 개인 차가 있고, 이건 그냥 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부언 설명이 있지만, 한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한 사람 안에는 ‘남성적’ 혹은 ‘여성적’으로 분류되는 특성들이 혼재돼 있다. 그 특성들 중에서 강인하고 패기 넘치는 것은 남성적, 부드럽고 섬세한 것은 여성적이라는 이 분류가 이제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설명할 때 굳이 그런 수식을 쓸 필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렌>을 보면서 5년 전에 딸아이가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그날 완전히 체화됐다. 그리고 세상 멋진 그들의 특성을 ‘남성적’이라고 분류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좋은 보물을 남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서.
아주 솔직하게 표현해보겠다. 앞에서 말한 두 참가자 정민선과 김성연은, 지금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해 어떤 한계를 통과한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다.
더 솔직히 말해보겠다. 정민선과 김성연을 보면 아마 흔히 ‘남자 같다’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속으로 그런 생각이 지나갔다. 여성에게 남자 같다는 말, 남성에게 여자 같다는 말은 대개 악의적으로 쓰인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면 그 일반화에 포섭되지 않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당하는 꼴이 된다. 부드럽고 섬세한 특성은 매우 좋은 장점인데 이 특성이 강한 남성들에게 종종 우리 사회는 더 남자다워질 것을 요구한다.
젠더리스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하이힐과 치마를 즐겨입는 남성이 등장하고, 시크하고 파워풀한 분위기의 옷을 즐겨 입는 여성이 늘어났다. 세계적인 명품 패션 브랜드들도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허무는 옷들을 계속 내놓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성 정체성을 구별할 수 없는 시대다. 패션, 뷰티, 아트 분야에서는 일단 그렇다. 이것이 MZ세대의 독특한 문화라는 기사도 넘친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세대에 따라, 성별에 따라 성인지 감수성의 차이가 크다. 세대별 차이야 그렇다 쳐도, 동시대를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 사이의 성인지 감수성 차이는 거대한 벽이 됐다. 이 벽이 너무 거대해서 이 벽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보일 정도다. 외면적 젠더리스 시대는 왔지만, 내면적 젠더리스 시대는 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사이렌>을 보면서 느낀 전율이 내게는 오래도록 매우 참신했다. 내 안의 굳은 고정관념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느낌이었다. 고정관념이란 허물어지라고 있는 건가 보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