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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Feb 20. 2024

'멋있는 사람'... 글쎄?
작은 식당 주인장의 금팔찌

생각의 창 #유레카3월호



추상적인 개념어들,

진실의 훼방꾼 될 수 있어


‘사랑, 희망, 용기, 정의, 민주주의…’ 개념어란 추상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개념어들은 정체를 알기 어렵다. 변기라는 말과 정의(正義)라는 말을 비교해 보자. 변기는 특별한 용도를 가지고 탄생한 사물이다. 누구든 직관적으로 변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재질과 모양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변기라는 말 자체의 혼돈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실물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의는 다르다. 정의는 ‘진리에 맞은 올바른 도리’, ‘사회를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치적 사기를 포장하려는 레토릭으로 자주 남발된다. 더구나 사회가 복잡해 개인 간, 집단 간 ‘각자의 정의’가 너무 달라 사회집단 안에서 이 ‘각자의 정의’가 계속 충돌한다. 더 참담한 것은 정의를 세우겠다며 높이 든 칼날이 부정의(不正義)로 귀결될 때다. 과거 전두환 정권은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모토를 앞세우고 죄 없는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다. 정의에 대해 수없이 말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모호한 개념어들로 인한 갈등이 늘 사회적이고 극단적인 일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곧잘 갈등을 일으킨다. 사람들마다 개념어에 대한 정의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게 사랑이야?!”참으로 진부한 드라마 대사 같은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설혹 이 말을 내뱉지는 않았어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한편 ‘사랑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사랑이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라고도 생각한다. 앞의 사랑과 뒤의 사랑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를까? 인간 관계의 수많은 오해들도 대부분 이런 개념어에 기반한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니, 소통을 잘하려면 앞뒤 문맥에 따라 개념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세심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만일 토론을 위한 소통의 경우라면 개념어 정의를 분명히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추상적인 관념을 담은 개념어라는 그릇은 투명 망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체를 확인하려면 고차원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동기를 보내고,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부터 최근까지 나의 모토는‘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라고 할 때의 멋과 비슷하달까. 나름 내가 추구하는 멋에 대해 자부심도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멋을 말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십중팔구 손발이 오글거릴 것 같아서 생략한다.  


그런데 며칠 전, 처음으로 내가 되고 싶어하는 멋있는 사람이란 어떤 모습을 말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멋있으려는 마음’ 자체를 의심하게 됐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멋있음은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웃기고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한 식당 주인장의 손목에 찬, 번쩍거리는 순금 팔찌를 본 그날이었다.   

명절 전날 정릉시장 부근에서 친구와 밥을 먹기로 했다. 정릉천을 따라 걷다보면 북한산 입구가 나와서 산책하기도 좋고, 어릴 때 살던 동네 같아서 자주 찾는다. 특히 이곳 시장은 시장 본연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릉천 안쪽으로 큰 아파트 단지가 없어서 그런지 옹기종기 상가들이 모여 있는 시장은 늘 활기가 넘친다. 시장이 골목형이 아니라서 화려한 비가림막 같은 게 없고, 80~90년대 동네 골목처럼 푸근하다. 


명절 밑이라 더 북적거렸고, 가려던 밥집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터덜터덜 걷다가 늘 지나쳤던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가정식 백반집 같은데 함바집 느낌이라 가봐야지, 라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침도 거른 상태라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40년도 넘은 식당은 홍어찜 같은 것도 해서 콤콤한 냄새도 났다. 한 테이블에서는 어르신 한 분이 혼자 낮술을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7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주인 아주머니가 편하게 앉아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슈퍼에서 막걸리를 얼마에 파는지 물어보다가, 우릴 향해 방금 한 무리의 손님이 왔다가 이런저런 일로 그냥 나갔다는 얘길 하더니, 시골에서 식구들 먹으라고 게장을 보내왔는데 이따 먹어보라고도 했다. 딱히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뭐 그런 얘기들이 들렸다. 일찍 장사를 접으려고 했는데 우리가 들어왔고, 주방 이모님도 막 식사를 할 참이니 앉으라고 한 것 같다.   


압력밥솥에서 쉭쉭 소리가 났다. 병어조림을 시키고 꽤 기다렸다. 아마도 밥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다 아주머니의 얘기에 맞장구를 치게 됐는데, 아주머니 손목에 너비가 꽤 있는 큼직한 순금 팔찌가 번쩍 하고 눈에 들어왔다. 클레오파트라의 팔찌만큼 화려하고 멋있었다.  

“어머, 팔찌 너무 멋있어요.”라는 말에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아휴 이게 왜 나왔어’라고 하면서 옷으로 가리려 했다. “너무 이쁜데 왜 가리세요?” 라고 하자 멋쩍은 듯 설명을 해주었다. 요지는 이렇다. ‘이 장사를 수십 년 해도 뭐 하나 (날 위해)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금팔찌를 하려고 오랫동안 계를 묻었다. 이 팔찌가 10냥짜리다. 수공까지 하면 400만원쯤 들었다.’

세공이 좀 색다르다며 은근한 자부심도 내비쳤다. 


얼마 있다가 새로 갓 한 밥에 푸짐한 한 상이 나왔다. 게장도 올려져 있었다. 짜지도 맵지도 않게 아주 맛있었다. 대부분의 밑반찬도 모두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시골할머니 댁에서 받은(받을 것 같은) 정겨운 밥상이었다. 친구랑 이 집 단골하자며, 여기 있는 메뉴 하나씩 다 먹어보자고 하면서 아주 맛있게 먹고 나왔다.    

    


정의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주인 아주머니의 팔찌는 뭔가 언발란스한데 너무 잘 어울렸다. 그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사물로 혼자만 눈에 띄게 반짝이는 데 묘하게 뭉클했다. 몸은 말라 가벼워 보였고, 음성은 컬컬하고 투박한데 정겹고 따뜻하다. 소박한 보통 아주머니이지만 당당한 카리스마가 음성과 태도에 스며 있었다.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이지만, 이 식당을 몇십 년 운영하며 살아낸 어르신의 ‘짬’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아주머니의 순금 팔찌는 몇천 만 원짜리 명품 가방이나 시계보다 내 눈엔 더 값지고, 아름다워 보였으며, ‘간지’가 났다.  


많은 사람들이 멋있게 살고 싶어 한다. 좋은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사색을 하고, 여행을 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많은 것들을 해보고자 노력한다. 내가 추구했던 멋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과장된 인상 비평일 수 있지만, 그분은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세상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굳이 인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분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단단한 내공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정의란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 무엇이 정의이고 부정의인지는 실천과 태도로만 판별할 수 있다. 사랑, 용기, 멋, 우정, 희망 같은 개념어들은 종종 우리를 현혹한다. 실체가 없으니 머릿속으로 제 마음껏 부풀리고, 제 꾀에 제가 속듯 자주 우리를 실망시킨다. 진짜 멋과 가짜 멋, 진짜 용기와 가짜 용기, 진짜 우정과 가짜 우정,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 이런 것들은 행위를 통해서만 판별될 수 있다.  


세상에는 멋쟁이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멋일까?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사랑인지 모르듯 무엇이 진짜 멋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날 이후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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