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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나 Nov 10. 2021

엄마 잃은 세 아이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독백

<1>세계단편깊이읽기 #나의어린것들 #아리시마다케오

"너희들은 내가 쓰러진 곳에서부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너희들은 희미하게나마 나의 발자취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인생은 길이다. 누군가는 낯익은 길을 가고, 누군가는 가시덤불투성이 길을 선택한다. 어떤 길이든 그 여정은 외롭고 힘에 부친다. 그래서 앞서 길을 가고 있는 이들의 가슴속에는 어쩔 수 없는 회한이 안개처럼 짙다. 특히 앞선 이가 부모일 때의 심정이란…. 


작품해설_<나의 어린 것들>(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한 사내의 독백을 듣는다. 홋카이도, 맹추위가 서성거리는 곳에서 사내는 인생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있다. 결혼도, 아이를 얻은 것도 조금은 힘에 부치는 젊은 글쟁이 사내. 차례로 세 아이를 얻었지만 사내는 '어지러운' 원망 때문에 어린 아이를 건사하는 아내로 하여금 종종 서러운 생각이 들게도 했다. 다행한 건 경제적인 형편은 넉넉하다. 

그러다 덜컥, 아내는 불치병(당시로서는)인 결핵을 앓는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젊은 엄마와 남겨진 삼남매, 그 모든 것을 불안스럽게 지켜보며 함께 감내해야 했던 젊은 아버지.  


"너희들은 작년에 하나밖에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를 영원히 잃고 말았다. 너희들은 태어나자마자 생명에 가장 중요한 양분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엄마를 잃은, 생의 중요한 양분을 빼앗긴 어린 아이들. 애비의 마음속에 들어찬 비감한 심정을 어찌 헤아리랴.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자신의 독백을 들려준다. 이 독백은 첫 아이를 낳던 날로부터 아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의 일을 회고한다. 아내를 잃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남겨진 젊은 애비의 독백이 뭐 얼마나 유니크하랴마는, 나도 모르는 새 애잔함에 가만히 젖어든다.  그리고 그 애잔함은 한마디로 표현할 길 없는 사람살이의 웅숭깊은 맛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유산에 대하여…


아리시마 다케오의 <나의 어린것들에게>. 작가 이름도 작품명도 둘 다 생소하다. 일본대표작가의 단편선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읽은 작품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보내는 애비의 독백. 애비는 이렇게 운을 뗀다. 


"너희들이 자라서 어엿한 인간으로 성장했을 때--그때까지 너희들의 애비가 살아 있을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애비가 글로 남긴 것을 펼쳐볼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는 이런 독백을 남기려 하는 걸까?' 아주 사소한 궁금증만 품고 기대 없이 읽어나가다가 작은 얘기 속에 녹아 있는 섬세한 사색에 잠시 놀란다. 다케오는 1878년 출생. 근대의 서막이 오르던 시절의 일본 작가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놀랍도록 현대적이어서 그가 그린 아비의 모습을 보며 저절로 지금의 젊은 아버지들이 떠오른다. 맑고 섬세하며 깊이 있는 문체와 사색들.  

그의 첫 문장에 끌렸던 이유는 또 있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좇는 마흔 끄트머리의 글쟁이 아들에 관한 소설을 함께 읽고 있었다. 장 폴 뒤부아의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폴은 이혼하고 아이도 없이 '개와 담배와 회한에 사무친 추억만 곁에' 두고 사는 소설가다. 젊지 않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뭘 하고 사는지 도통 모르는 폴. 그는 밤이면 베란다에 나와 담배를 피며 '진정한 유산'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는 캐나다의 한 호수에서 사라졌다. 스스로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다. 이야기는 소설 쓰기에 숨어 있던 폴이 세상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헤매다 아버지의 삶에 다가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자식들이 어버이의 경험과 지식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한 존재가 한 생에 걸쳐 쌓아올린 정신적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일 텐데, 그리고 세상은 한없이 풍요로워질 텐데.


어버이의 경험과 지식, 이것이 폴이 생각한 ‘진정한 유산’이다. 그는 이 유산을 통해 “어떤 기쁨과 어떤 슬픔이 삶의 길목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등등에 대한 귀하디귀한 정보”를 얻고 싶다.  유언장이란 게 있지만 거기에는 "쇠붙이들을 어떻게 나눠가지라는 말만 나와 있을 뿐, 정신적 유산에 대한 이야기는 온데간데 없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폴이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그 유산을, <나의 어린것들에게>의 젊은 애비가 엄마를 잃은 가엾은 아이들에게 남기고자 한 것이다. 소란스럽지도, 격정적이지도, 고난에 차지도 않은 나지막한 애비의 독백 속에는, 폴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들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진정한 유산’이. 

어른인 폴은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통해 아버지의 삶에 다가가고, 그럼으로써 제 길을 비로소 찾는다.  

엄마를 잃은 어린 세 아이들이 애비의 ‘진정한 유산’에 기대 하루하루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흔해빠진 일에서도 인생의 쓸쓸함에 부딪힌다


애비의 첫 회한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내를 잃은 후 사내는 ‘나의 어머니’란 소소한 감상문을 청탁받는다. 그는 별생각 없이 ‘나의 행복은 어머니가 처음부터 한 분이셨고 아직도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라고 적는다. 그러고는 “만년필이 그것을 채 다 쓰기도 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생존에 나는 행복하건만 어머니가 부재한 내 아이들은 회복할 길 없는 불행에 빠져 있지 않은가. 애비는 아이들의 불행이, 사무친다. 

사내는 애비로서 어떻게든 아이들의 불행을 덜고 싶은 양 독백의 글을 쓴다. 

아이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머니가 어떻게 ‘최고의 태도’로 죽음을 맞았는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또 아이들과 함께 애비가 그 시련을 어떻게 견뎌나갔는지에 대해. 


다섯 식구는 하루하루 밀려오는 추위 앞에, 조그맣게 한데 뭉쳐 몸을 지탱하려고 하는 잡초 줄기처럼 서로 몸을 붙여 온기를 나누려 했던 것이다. 


병을 앓는 어머니나 지켜보는 애비의 가슴속엔 두려움이 한가득이다. 


너희들의 깨끗한 마음이 잔혹한 죽음의 모습을 보고 너희들의 일생을 더욱 어둡게 할 것을 두려워했고, 너희들의 쑥쑥 자라나야 할 영혼에 조금이라도 커다란 상처를 남기게 될까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이들은 겨우 여섯 살, 다섯 살, 네 살에 엄마를 잃었다. 

살아보면 누구나 알게 되는 게 있지.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이야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것들을 겪었는지 그 여정을 아는 것과 메마른 사실만을 인지하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그 일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일이다. 

사내의 독백에 감복한 이유는 또 있다. 

사내는 '아내의 죽음'이란 진력이 날 정도로 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일에 주목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도. 자신과 아이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청천벽력 같은 슬픔이지만, 세상에 슬픈 일이란 지천으로 깔려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 흔해빠진 일을 통해서도 인생의 쓸쓸함에 깊이 부딪쳐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커다란 일은 커다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 


애비의 이런 육성을, 폴은 듣고 싶어했던 것 같다. 

사내의 독백은 계속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이 들어선 커다란 길에 대해서도. 사내는 아이들 어머니의 희생 속에서 소심하고 아둔하게 움츠려 있던 나약한 자신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예민하게 자신의 아둔함을 꿰뚫어 보았으며, 대담하게 자신의 소심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큰 길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이 고백을 통해 사내는 그들 가족 개개인에게 닥친 불행의 정체를 분명하게 한 다음, 이것이 어쩌면 모든 인생에 복병처럼 숨은 수많은 불행의 한 모습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이상 인생에 깊이 관여해야 한다고.   



쓰러진 부모를 뜯어먹어 힘을 비축하는 사자처럼


자식들보다 앞서서 삶의 길을 걷는 어버이의 마음이란 이런 것인 모양이다. 애비는 참으로 짧은 글 속에 제가 살아온 삶의 지혜를 차곡차곡 담으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삶에 대한 애비의 철학은 깊고 따뜻하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개인의 불행이다. 애비는 아이들에게 인생살이의 중요한 한 대목도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만의 슬픔에만 빠져 있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애비는 아내와 똑같은 병을 앓는데도 가난 때문에 약값이 없어서 하혈을 하면서도 직장을 나가야 했던 U씨의 사연을 말한다. 큰 병마와 싸워 죽음을 맞이했지만 적어도 어머니는 금전적 궁핍함은 없었다며, 아버지의 당부는 이어진다. 


너희는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U씨도 함께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무서운 격차를 메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애처로운 인생의 싹들, 이미 닥친 불행을 어린 싹들이 어떻게 이겨나갈까 애비의 마음은 쓰라리지만, 그래도 삶이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애비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귀족 집안 출신이지만 하층민의 어려운 삶에 눈을 뜬 작가 다케오의 따뜻한 진실이 전해져 오는 대목이다. 

길을 먼저 가는 자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을 수밖에 없다. 평평한 길 속에 감춰진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매복한 들짐승 앞에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푸르른 이파리 뒤에 낙엽이 어떻게 쌓이는지도 알게 된다.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내 밖의 일들이다. 그 일들이 내 안에서 어떤 슬픔을, 고통을, 기쁨을, 따뜻함을, 냉소를, 희망을 주는지 뼈저리게 겪는다. 

혹시 뒤돌아봐서 내 뒤를 따라오는 이가 있다면, 만일 그이가 자식이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려주고 싶을까. 

애비는 마지막 노파심 하나도 빠짐없이 채워넣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처해 있든 너희들이 도움을 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너희들의 젊고 왕성한 힘을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선 나 같은 것을 위해 써서는 안된다. 쓰러진 부모를 뜯어먹어 힘을 비축하는 사자처럼 힘차고 씩씩하게 나를 버리고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정말로 세상을 비치는 태양의 빛과 같이 커다란 것인가. 어린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병이 옳을까 애끓던 어머니의 장엄한 최후도 그렇지만, 이제 막 움터가는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염려 어린 당부 속에는 사랑이 그득하다. 

어쩌면 길다면 긴 독백을 한 줄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 말일 거다. 


“내일은 어제보다 크고 현명해져서 침상 속에서 뛰쳐나오기 바란다.”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소설가. 1878년 3월 4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화혼양재(和魂洋才) 사상이 철저했던 아버지의 교육방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웠고, 외국인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귀족학교인 가쿠슈인을 졸업한 뒤 농학자가 되고자 삿포로 농업학교에 진학하여, 1901년에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다. 1903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포드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으며, 휘트먼과 입센, 톨스토이 등 서구문학, 베르그송과 니체 등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1907년 귀국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에는 신앙에 회의를 품고 기독교에서 이탈해 사회주의연구회를 이끌었다. 

1910년 동인지 <시라카바(白樺)> 창간에 참가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많은 소설과 평론을 발표해 시라카바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16년 아내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하면서 <카인의 후예> <태어나는 고통> <미로> 등을 발표했으며, 1919년에는 대표작 <어떤 여자>를 완성했다. 1922년 '선언 하나'를 발표한 후, 홋카이도의 아리시마 농장을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지 해방을 시도했다. 1923년, 기자이자 유부녀인 하타노 아키코와 동반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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