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었다.
10월의 계획은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이 '아무것도 안 하기'에는 대체적으로 재취업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포함시켰다. 이를테면 구직사이트 들여다보지 않기, 재취업을 위한 공부 하지 않기 등등. 6년 동안 '일'이라는 스트레스에 파묻혀 살았던 나를 위해 직장 다닐 때는 꿈도 꿀 수 없는 한 달간의 휴식을 보상으로 내린 것이다. 그리고 11월부터 이력서를 넣으며 취업 준비를 시작해 내년 1월에는 어떻게든 재취업에 성공하기로 했다.
규칙도 두 가지 정했다. 밤 낮 바뀌지 않기, 잘 먹고 잘 자기. 이 계획과 규칙이 잘 지켜진다면 나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딱 3개월의 백수기간을 바람직하게 보내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10월.
평소 자던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잤고 일어나던 시간보다 한두 시간 늦게 일어났다. 몇 일간은 내일도 회사를 안 가도 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시간에 회사에 있지 않은 내가 어색했다.
시간이 너무 많았다. 밥을 차려 점심을 천천히 먹고 설거지까지 끝마쳐도 오후 한 시였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세시가 조금 지나있고 책을 조금 읽고 나면 다섯 시가 채 안되어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환했다. 오후 다섯 시. 상담을 두 개 정도 마치고 나서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지도 못한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정을 매일 똑같이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내일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게 하나의 일과가 되었다. 세상에, 시간이 없어서 쇼핑도 운동도 못한다며 불평을 늘어놓던 내가 이제는 시간이 많아서 문제라니.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서서히 이 지루하고 따분한 백수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숙련되어갔다. 평일 한가로운 한낮에 전시회를 가거나 해가 질 때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근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운동을 했다. 재밌는 책을 밤새도록 읽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청소의 횟수를 늘려 거의 매일을 쓸고 닦았다. 몸을 계속 움직였다. 자는 시간 외에는 침대에 눕지 않았다.
몸을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져 마음이 불안했다. 10월은 휴식의 기간으로 정했는데 쉬면서도 영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운동이나 하고 전시 관람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쓰는 게 과연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들었다. 가끔씩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문득 내 처지가 억울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마음을 비집고 올라와 여기저기 헤집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저마다 사회가 정해준 자리에서 제 몫을 다 하고 있는데 나는 집에서 방바닥이나 닦고 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람.'
갑자기 너무 화가 나고 나를 자른 회사가 원망스러워 죽겠는 날에는 어쩔 줄 몰랐다. 마음속 부정적인 생각을 처리하는 기관의 용량이 꽉 차서 마구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동안 억지로 외면했던 걱정과 고민을 몰아서 하며 후련한 기분이 들 때까지 울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백수 생활의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는 아득함이었다. 코로나가 계속 활개를 치고 있어 일하던 업계가 망하는 수순을 밟고 있으니 당장은 경력을 살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성격 상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다시 일을 하게 되기 전까지 맘 편히 놀고먹을 수가 없었다.
11월이 되자마자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처음 취업준비를 시작하던 시절에 비싸게 주고 찍었던 이른바 '취업 증명사진'을 클라우드 사진 보관함 저 아래까지 스크롤을 내려 찾아내 6년 만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다시 썼다. 고민 끝에 신입사원으로 이력서를 넣은 회사는 채용 기간이 끝나도록 깜깜무소식이다. 앞으로 이런 고배를 몇 번이나 더 마시게 될까. 20대부터 쌓아왔던 경력이 무색하고 쓸쓸하다. 간당간당 잘 붙잡고 있었던 자존감도 낮아져 간다.
누가 말해주면 좋겠다. 아니라고, 지금 잘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