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점에 가까운 요가 실력에 비해 나의 요가 역사는 이미 수년에 걸친다. 게다가 여러 곳을 거치기까지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등록한 초반에 잠깐 반짝였다가 점차 불성실하게 출석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교차되어 수업을 진행한다는 장점에 반해 들어간 요가원들이 결국 어느 것 하나 깊이 있게 배우질 못 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가 뒤에는 “수련”이라는 말이 붙는 것을 자주 보곤 하는데, 나는 수년에 걸쳐 띄엄띄엄 요가 “흉내”를 내 왔던 것이다.
최근 "집 앞에서 3분 컷"이라등록한 요가원은 기대 이상으로 심도 있는 곳이어서 숙련자가 많다. 그들이 현재의 나로선 할 수 없는 동작들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 경탄이 절로 나온다(사실 방금 문장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동작”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동작만 못난 사람이어야지 마음까지 못나야겠는가). 등록 전 상호명에 “하타요가”가 들어가는 걸 보고 우매한 나는 “한 가지 요가만 한다고? 지겨울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그 한 가지 세계가 얼마나 깊을지 상상도 못 하고.
그 흔한 거울도, 음악도 없는 공간에 요가 선생님은 구두로 안내를 할 뿐 동작을 직접 선보이진 않는다. 요가 용어를 잘 모르는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해 주변을 휙휙 둘러보고 따라 하기 바쁜데 그 사이 선생님은 전체를 조망하고 각 회원들마다의 자극 점을 짚어준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어느 영화 속의 인도자를 연상케 하는데 요가의 세계는 온전히 스스로 도달해야 해야 함을 수업방식을 통해 알려주는 것만 같다. 수련자들이 길을 잃지 않게 다만 방향을 제시해 줄 뿐.
동작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유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관절과 근육이 유연함에 도달할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임을 배운다. 줄곧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일컬었던 옛 말은 휘어지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인고의 세월 끝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간과한 말이었던 셈이다. “꼰대”나 “세대갈등”과 같이 사고가 유연하지 않은 탓에 만들어진 단어를 떠올리다보면 요가는 몸을 열어 자유롭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마저 개방시킴을 알 수 있다. 운동이든 언어든, 그 규칙을 배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철학을 탐미하는 것과 같다.미약하고 느리더라도 용기를 내어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