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흘림골로 향하던 새벽, 전날부터 쏟아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까만 하늘에 토닥이는 빗줄기 소리를 곤한 귀로 들으며 나는 수년 전 페루의 마추픽추로향하던 그 밤을 떠올렸다. 쿠스코라는 도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마추픽추는 쿠스코 도심에서 관광열차를 타고 아구아 칼리안테까지 들어간 후 전용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열차에서 내리면 마추픽추로 향하려는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숙소들이 즐비하다. 작은 규모의 동네라 어느 곳을 선택해도 자주 지나가는 열차 소리를 아주 피할 수는 없지만, 하루 묵고 새벽에 향할 목적으로 선택한 나의 값싼 숙소는 그중에도 열차와 맞닿은 곳이라 밤늦은 자정까지도 기차가 지나갈 때면 건물 전체가진동으로 흔들렸다. 막연히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이런 건가 싶었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고 깨끗한 침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에 만족했지만 동행하던 부모님께는 민망스럽고 죄송했다.
기차소리에 잠 못 이루던 늦은 시간, 우린 모두 자연스럽게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창 밖을 보게 됐다. 천장이 뚫린 것처럼 퍼붓는 비를 보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과연 오늘 마추픽추를 이 비를 뚫고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일찌감치 줄을 서야 버스를 먼저 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던 터라 반신반의하며부스스 일어났다. 미리 싸 둔 짐을 카운터에 맡기고 출발하기 전 서울에서 가져온 쿠커로 라면을 끓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자 퉁퉁 부은 눈으로 한 젓가락씩 하며 서로의 행색을 보니 꾀죄죄한 몰골에 웃음이 났다.
어제 체크인할 때 봤던 현지 여성 직원분이 체크아웃을 도왔다. 아침 일찍 나설 것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이렇게 왔다가 잠깐만 머물고 가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익숙한 태도로 오전 6시도 안 된 시각에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정리하고나서려는 우리에게 사람 수만큼 손바닥 두 개만 한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조식 대신이라는 듯했다. 공짜밥은 늘 반갑지만 타지에서 생각지도 않은 호의에 감사하며 들떴다.
빗줄기가 무색하게도 이미 수많은 사람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나와 있었고길목에 들어선 가게들도 문을 열고 커피나 간식이나 우비를 팔고 있었다. 우리도 가지런히 버스 줄 선 사람들 뒤로 차곡차곡 섰다.노하우가 있는 몇몇 사람들은 종군기자들이나 입을법한 우비를걸치고 있었다.외국에 나오면 괜히 어떤 사람들이 많이 오나 주변을 휙휙 보게 되는데 대부분이 백인들이라 작고 까무잡잡한 페루 원주민들과 대조가 됐다. 남미 전체로 보면 백인이 3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우리처럼 바다를 건너온 사람도 많겠지만 주변국에서 온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부모님을 대기열에 세워놓고 버스 줄을 따라 걸어보니 80걸음도 넘었다. 빨리빨리의 민족에게 부지런함에 굴욕감을 주다니, 어디에서 왔건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다.
설렘이 앞선 탓에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곧 동트는 시간이 다가오고, 빗줄기도 멈췄다. 까만 버스가 하나 둘 나타나자 줄은 금방 빠졌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곡예하듯 마추픽추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안내를 해주겠다는 현지 가이드들도 있었는데 가격이나 물어볼걸 바가지가 무서워 그저 피한 것이 약간 후회가 된다. 꼭 그럴 필요 없었는데 왜 그리 쫓기듯 가난한 마음으로 여행을 한 건지.
산맥 속에 숨어 있던 옛 태양의 제국은 입구에서 몇 걸음을 떼지도 않았는데 위용을 드러냈다.장막이 걷히고 멋진 극의 시작을 알리듯뾰족하게 올라온 산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던 안개가 바람에 밀려나고 햇살을 비추며 사람들에게 어서 오라 속삭였다.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도 자연 속에서 이런 압도감을 줄 수 있구나, 그곳에 도착한 모두가 들뜬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참 사진기를 들이대며 구경하다 사람들이 먹거리를 꺼내 하나 둘 앉던 곳 근처에 우리도 적당히 앉았다. 아침에 건네받은 종이봉투엔 샌드위치와 음료, 간단한 간식 두어 개가 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장관을 눈앞에 펼쳐놓고 따뜻한 호의를 꼭꼭 씹어 삼키며 앉은 그때, 나는 신선이 된 것만 같았다. 더 바랄 것도 없는 초월한 행복이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