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탈리아-영국.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1년 치 공연 스케줄을 살피고 있다. 언젠가는 꼭 여행과 그의 공연을 엮어 다녀와야지.
"엄마" "엄마"
"하루에 엄마 이십 번만 부르라고 했지!"
한창 까칠한 큰 아이에 미취학 아동까지, 아들 둘이 내리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진다. 비현실적인 공연 일정에 기웃대며 괜히 아쉬운 모양새를 내본다. 매일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와의 거리는 우주 그 어디쯤.
대략적인 나이 고백을 하자면 HOT, 젝키, SES, 핑클, GOD를 학창 시절 정통으로 만났던 세대다. 한창 친구들이 밤을 새며 콘서트 티켓을 구하고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수십 장씩 사재기하는 걸 보며, 팬심이 없다는 데 약간의 우쭐함도 있었다. 현실적이고 곁눈질 못하는 아이라는 칭찬을 들었지만 돌이켜보니 가망 없는 어떤 것에도 빠져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덕분에 연예인에 대한 찐한 추억도, 친구들과 팬심을 나누며 쌓은 정서도 남아있지 않다. 필요 없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킨다며 멀찍이 있느라 놓치며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무리 철벽녀라 해도 종종 흥얼거리고 찾아서 듣는 노래 몇 곡쯤은 있는데 김동률의 노래가 그러하다. 특유의 저음이 얹어진 멜로디가 따뜻해 찬바람만 불면 찾아 듣곤 한다. 특히 대중가수임에도 사랑받기 위해 너무 애쓰지 않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앨범이나 공연 홍보에도 열을 내지 않는 담담함. 음악 외적으로 무신경할 수 있는 모습이 꽤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트위터에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대한 찬사를 한껏 격앙된 어투로 남겼다. 그렇게 처음 조성진의 연주를 만났다.
하필이면 쇼팽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폴로네이즈를 첫 곡으로.
작은 체구에 눈 밑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자칫 잔잔한 일본영화 속 인물 같던 그는 연주가 시작되자 돌변한다. 작은 키는 다부짐으로, 조용해 보이던 얼굴과 머리카락은 격정적 연주에 맞춰 시시각각 변하는 소품처럼 보였다. 광기 어린 표정, 확신에 찬 건반 위 움직임, 연주를 마친 그에게 보낸 현지 관객의 환호성까지 영웅 폴로네이즈 영상 하나로 완벽히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이곡으로 쇼팽콩쿠르 우승과 동시에 폴로네이즈 특별상을 거머쥐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폴로네이즈는 외국인이 특히 치기 어려운 템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폴란드의 전통 무곡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들만의 국민성과 자부심이 녹아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그런 곡을 동양의 한 남자가 현지인들을 상대로 펼쳐내고 그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낸 것.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콩쿠르 결선 첫 번째 연주자였던 조성진의 연주를 듣고 그의 우승을 확신하는 문자메시지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보냈다고 한다. 결선 연주를 막 끝낸 조성진에게도 직접 메일을 보내 미리 우승을 축하하기도 했다고.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매혹적인 연주에 압도당하면서도 이 청년의 재능 너머의 것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어린 나이에 큰 무대에 설만한 실력과 배포를 갖추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고된 나날들과 함께이지 않았을까. 음악을 대하는 태도, 성실함, 인내심을 지켜가기 위해 그와 그의 부모가 거쳤을 시간이 꽤 녹록치 않았을 것이란 걱정도 한다. (연예인 걱정도 하는데 바람직한 걱정에 속하지 않나)
쇼팽콩쿠르 영웅폴로네이즈 음원에는 곡이 끝나고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함성소리가 함께 녹음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을 때면 흡사 조성진과 클래식 음악처럼 전에 모르던 영역의 아름다움을 깨우친 내게 축하를 보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서 와, 이게 클래식이야!'
사랑하는 여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했는데 비가 쏟아지고 그녀를 집에서 한없이 기다리던 병약한 남자. 남자는 연인과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곡을 쓴다.
비를 맞지는 않을까,
길을 잃은 건 아닐까,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아, 이 곡이 빗방울 전주곡이었구나. 이건 비창, 이건 라흐마니노프.
어디선가 들었던 곡이지만 작곡가도 제목도 모르던 곡들에 얽힌 이야기를 쫓는다. 무수히 지나쳤을 음악에 멈춰 그 아름다움에 감격한다. 그 덕에 마흔이 다 되어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름답고 좋으니까
클래식 음악의 시작이 조성진 이었다면 유튜브 알고리즘은 클래식 음악과 그에 대한 덕질에 속도를 붙였다. 유튜브만 켜면 쇼팽콩쿠르 연주영상을 필두로 베를린 필하모니, 런던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그의 연주가 관련영상으로 떴다. 해당 곡과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들, 그 곡을 쳤던 다른 연주자들의 버전까지 그동안 몰랐던 클래식음악 영상들이 쏟아졌다. 예전처럼 돈을 내며 공연에 가지도,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도 너무도 쉽게 훌륭한 공연을 볼 수 있었고 클래식을 알리는 콘텐츠들이 차고 넘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주아주 오래된 음악을 유튜브라는 현대적인 툴 덕분에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 다시 유튜브를 켠다. 피아노 건반 개수 88개를 기념하는 세계 피아노의 날, 조성진을 알기 전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그날, 피아니스트들의 릴레이 콘서트를 기다리기 위해서 잠을 미룬다.
안락한 그의 방,
숱한 시간 그와 함께했을
그랜드 피아노가 보인다.
빛을 내며 흘러나오는 브람스의 OP 118.
내일 애들을 깨워야 해도, 전혀 모르는 음악이어도, 나이 먹은 아주미여도 그 순간 오롯이 행복한 문화 소비자로 나아간다. 앞으로 뻗어가는 귀한 청년에 걸맞는 팬심과 덕질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