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곳곳에 숨겨진 북극러시아의 비밀도시들
북극러시아 (마지막)
이전 글
아침 일찍 일어나 블라디미르의 차를 타고 무르만스크 남쪽으로 향했다.
무르만스크 남쪽에 있는 도시 이름은 ‘콜라’ 시 인데, 이곳에서 콜라 강과 툴로마 강이 만나 콜라 만으로 이어져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여기까지 내려온 이유는 콜라 시의 한 작은 교회에 들러 매우 오래된 목제 십자가 하나를 구경하고 난 뒤 콜라 만의 맞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이다.
무르만스크의 맞은편에는 숲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도로 옆에 뜬금없이 있는 한 전쟁기념공원에 들러서 무르만스크 전망대(?) 같은 게 있길래 잠깐 들렀다가 더 숲속 깊이 들어갔다. (딱히 볼 건 없음)
차를 세워두고 걷고 걸어서 산 넘고 물 건너며 산책했다. 산책의 길 끝에는 뭐 대단한게 있어서 목표 삼아 걸은 것은 아니었고 그냥 오랜만에 숲속의 물소리와 나무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오솔길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따금씩 자전거 세워두고 낚시 하는 러시아 아저씨들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모기. 여름의 콜라 반도에 모기떼가 창궐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후드 뒤집어쓰고 난리를 다 쳐도 결국 눈두덩이가 띵띵 부어올라 가려워 죽겠다. 정말 숲에 사는 모기들을 누가 이겨...
그렇게 모기들과 한바탕 하며 함께 걷다 보니 시원한 폭포가 나왔다. 라브나 폭포라는 곳인데 라브나 강을 따라 콜라 만으로 빠진다. 여름에 이런 곳에서 물놀이같은 것을 해도 좋을 것 같겠지만 아무도 없는 이유는 이곳의 7월 현재 기온이 9도이기 때문. 특별한 폭포는 아니다. 그냥 폭포.
숲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콜라 만을 따라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민키노를 지나 쭉올라가면 저 멀리 맞은편에 무르만스크 북쪽에 있는 도시 하나가 보인다. 세베로모르스크.
세베로모르스크(Североморск)는 ‘북쪽 바다의 도시’라는 뜻으로, 외국인 출입금지구역이자 비밀도시다. 러시아 북극 핵 함대의 주둔지기 때문에 나같은 외국인은 당연히 출입 금지이며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봐야 별거 없을 것이긴 하다)
콜라 반도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러시아의 군사비밀도시가 굉장히 많이 있다. (세베로모르스크, 세베로모르스크-3, 폴랴르니, 레틴스코예 등등.) 사실 이전에 갔던 바닷가 마을 테리베르카도 출입통제구역이었다가 몇 년 전 풀린 케이스라고 들었다. 아니 뭐 들어가봐야 별거 없을 거 같은데 굳이?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여튼 차를 잠시 세우고 맞은편의 항구를 쭉 유심히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항공모함, RosAtomFlot의 핵추진 쇄빙선 등등을 지켜보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대단한 감흥은 없었다. 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바닷바람이나 쐬면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애초에 막 그런 무기나 기계(?)쪽에 큰 흥미가 없기도 하다ㅎ 그냥 러시아의 군사비밀도시는 어떤 곳일까 정도의 궁금증?
아무튼 그렇게 점심 때가 되자 다시 무르만스크로 돌아왔고, 맥도날드 무르만스크점이 위치한 상가에서 기념품이나 좀 구경해볼까 싶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온 순간! 에스컬레이터에서 딱 마주친 테리베르카의 러시아 군인아저씨들!! (이전 글 참고)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었다. 서로 껴안고 난리부르스. 짧은 시간동안 덕담 주고받고 연락처 교환하고 헤어졌다. 너무 좋은 분들인데 아쉬웠다. 사실 대체로 러시아 아저씨들이 보드카 한 잔만 나눠 마시면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곤 한다.
기념품과 엽서를 조금 산 뒤에, 무르만스크 시내를 돌아다녀 보는데 와, 정말 도시가 이렇게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나 싶었다. 역시 여행은 날씨의 힘. 첫 날에 축축하게 비오고 흐리멍텅한 데다가 온갖 회색 빛으로 죽죽 범벅이 된 무르만스크의 거리가 아니었다. 비오던 첫 날에는 물에 젖은 종이박스같던 노란 건물들도 푸른 하늘 아래 아기자기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무르만스크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첫날의 칙칙하고 축축하던 느낌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첫 인상은 무섭고 세상 흑백이고 사람들 표정까지 회색빛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마냥 러블리(?!)하고 아기자기한 북극도시 무르만스크! 특히 공원에 가니 그런 느낌이 더 했다. 비록 사람들은 외투나 파카를 입고 돌아다니긴 해도 7월 한여름 햇살을 만끽하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죄다 공원으로 나와 맑은 날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 좋았다. 공원에 잠시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개를 데리고 나온 남성, 노인들, 신나서 펄쩍펄쩍 뛰는 아가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여행지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기분 중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느낌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날 때! 비로소 나 스스로를 꽁꽁 묶어놓던 경계심이 스멀스멀 녹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마지막 날이 다 돼서?)
아무튼 공원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알료샤 동상(참전군인 추모비)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알료샤 동상이 있는 곳은 무르만스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기 때문에 항상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알료샤의 발 아래에 걸터앉아 한없이 바라보는 무르만스크 항구와 그 건너편의 숲.
그리고 알료샤 동상 온 김에, 그의 가족들을 기념하여 만든 동상인 “Умеющим ждать”(기다릴 수 있는 자들)상으로 향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뒤의 보이지 않는 희생자들까지. 고작 동상에 그렇게 감정이입하는게 좀 오바(?) 유별(?)나보이기는 하지만서도 워낙 러시아에는 ‘갬성’을 건드리는 동상이나 기념비들이 참 많이 있다. 뭐 프로파간다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게 콜라 반도, 북극러시아 여행이 끝났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하고 휴가가 끝났으므로 나는 다시 출근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