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재외공관 공공외교 현장실습원, 주러시아대한민국대사관
K는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같은 과. 성향도 거진 비슷하다. 가장 큰 다른 점은 형은 챙겨주는 편, 나는 챙김 당하는 편. 아직 철들려면 멀었지만 여튼 나는 K형한테서 항상 많이 배우고 도움받는다.
K는 작년에 외교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주러시아대사관에서 6개월 간 인턴생활을 했다. 귀국해서는 나보고 강력 추천한다며 꼭 지원해보라고 했다.
나는 외교관을 꿈꾸고 있지만 솔직히 외교관이 뭘 하는 직업인지 잘 모르겠다. 바로 그 이유때문에 외교원 시험 준비를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 확신 없이 베팅했다가 망하면 어쩔 것인가. 그렇게 물가에 서서 풍덩 빠질까 돌아설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까짓거 발가락이라도 담가보자! 한 학기 직접 일해보자!해서 지원서 작성을 시작했다.
연초에 모집공고가 떴고, 바로 지원서 작성을 시작했다. 음.... 군대 전역하고 처음으로 지금까지 대학입학 이후 뭘 했는지 돌아봤던 것 같다. 이런 것 저런 것,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 미군장교로부터 받은 감사장과 표창장까지, 진짜 영혼까지 끌어모아 지원서를 작성해야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서류 통과하고 면접 통과해서 1지망이었던 주러시아대사관에 합격했다. 2지망은 주벨라루스대사관으로 했는데, 이유는 작년 전역여행때 비자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벨라루스를 루트에서 제외해야했기 때문이다.
다음 관문은 비자 받기.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무비자가 필요했다. 3주간 나는 그 비자를 가지고 대사관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비자 하나 받겠다고 대사관을 다섯 번 왔다갔다 하고 사직동 외교부에 틈만 나면 전화 걸었고(담당자님 죄송합니다...) 총영사한테 왜 일반여권 소지자인 내가 공무여권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해야 했으며 심지어 내 돈 내고 러시아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서류 요청하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받은 내 소중한 여권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첫 사회경험, 첫 자취, 첫 러시아 살아보기. 드디어 학교라는 우물 밖에서 나오는구만. 러시아는 여행으로 몇 번 왔었지만 살아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것 같았다. 그렇게 비행기는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다. 내려서 짐을 찾은 후 공항 밖으로 나왔다.
대사관 직원분께서는(곧 내 담당자) 출국하기 전에 내게 공항에서 픽업을 해줄 기사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내줬다. 담당자 서기관님은 그 정보와 함께,
"공항 출구로 나오자마자 횡단보도 두 개 건너서 가장 오른쪽으로 가 있으세요!"
일단 그 번호로 전화(한국 전화로 로밍요금 내면서...!)를 해봤다. 누군가 받기는 하는데 도통 뭔 소린지를 모르겠다. 이 때부터 러시아어로 전화하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나보고 어디냐고 그러는데 설명을 할 수가 있어야지. 기사님은 내게 '몇 번 출구로 나왔냐'고 물었지만 출구에 번호가 없는데?? (나중에 보니 있었음...눈을 제대로 안 뜬 내 탓)
결국 지나가는 러시아 아저씨 붙잡고 SOS. 어찌저찌 설명은 됐고 나는 차를 기다렸다. 빨간 번호판(외교 차량)을 단 차를 겨우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기사님이랑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역시 면대면 대화가 전화보다 훨씬 쉽다. 상대방 반응도 파악할 수 있고 모르는 것 있으면 찾아볼 여유도 있으니까.
봄의 모스크바는 곧 있을 2018 러시아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한창이었다. 도시 전체가 공사중이었는데, 디나모 경기장은 한창 건설중이었고 도로는 갓 깐 아스팔트로 보드라웠(?)다. 그냥 다 거리의 주요 건물들은 때빼고 광내느라 바빴던 것 같다. 그렇게 2018년의 모스크바는 작년에 여행으로 온 모스크바랑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시내에 들어온 후 한국에서 대사관 근처로 미리 예약해놓은 에어비앤비에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짐을 풀고 쉴 새도 없이 바로 다음날 첫 출근(!)이라 밥도 슈퍼에서 산 것으로 대충 때우고 양복부터 다림질 했다.
설레거나 두근거릴 여유가 없다. 정신없이 도착해서 정신없이 짐 풀고 바로 러시아 핸드폰 개통한 뒤 대충 밥 먹고 양복 다리니 새벽 1시.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