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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Dec 18. 2018

모스크바 자취방 구하기

외국인이라 서러워요

뭐 어느 나라나 다 그렇겠지만, 인종차별이 없지 않은 러시아에서 외국인으로 사는 것은 이따금씩 서럽고, 집을 구할 때는 약간 더 서럽다.

나같은 인턴은 거주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외국인이 러시아에서 집을 구할 때는 대략 몇 가지 방법이 있다.


1) 현지인들과 똑같이 cian.ru 나, domofond를 이용하기 (러시아어 사용)

2) 외국인을 위한 페이스북 그룹 'Moscow Expats Housing'

3) 외국인용 부동산 (비쌈. 매우 비쌈.)

4) 한국인 커뮤니티, koreans.ru


나는 당장 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유가 심하게 부족했고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돈은 없지만 러시아어는 할 줄 아니까 1번, 현지인처럼 구해보기로 결심했다. 러시아에서 방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점은 내가 아파트 전체를 빌릴 것인지(그것이 원룸이든 투룸이든), 아니면 방 한 칸만 얻어 나머지 공간은 다른 사람들과 생활할 것인지 여부이다.


모스크바에서 사도바야를 기준으로 원룸이 대략 한 달 50000루블 정도이고, 방 한 칸을 빌릴 경우 싼 곳은 시내에 20000루블 정도까지 내려갈 수 있다.


지도에 보이는 순환도로가 ‘정원의 고리’, 사도바야 순환도로다. 그 안쪽이 모스크바의 중심!


두 가지 모두 살아본 뒤(에어비앤비는 하숙, 자취는 원룸) 느낀 장단점을 적자면, 아파트를 빌리면 그 공간을 내가 독점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초대해 놀 수도 있고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모스크바가 모스크바인지라 월세가 매우 비싸다.

방 한 칸을 빌리면 상대적으로 저렴하므로 그 돈으로 여행을 다니거나 맛있는 것을 사먹을 수 있겠지만, 동시에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꿈도 못 꾸며 공용 공간(화장실, 부엌 등)을 사용할 때 눈치 보이고, 번갈아가며 청소를 해야 한다. 니 물건 내 물건 딱딱 구분해야 하는것도 피곤하다. 어느 날 밤에는 내 옆방에 사는 분(놈)이 방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초대했다(던 것 같다).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잔 날이었다...아무튼 나는 그래서 돈을 더 주더라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원룸을 구하기로 했다.


그 다음은 위치. 모스크바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지역은 사도바야 순환도로 내의, 크렘린과 성 바실리 성당, 각종 기차역이 모여있는 ‘시내’지역이다. 그리고 제3순환도로 바깥으로 나가면 이제 도시의 약간 외곽으로 나오면서 괜찮은 집값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모스크바는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이 매우 빨라서, 외곽에 위치하더라도 지하철역만 가까우면 시내까지 가는데 매우 편리하고, 반면에 시내랑 가깝더라도 지하철역과 멀면 이동하는데 정말 불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을 알아볼 때 중요한 것이 집 상태나 월세 뿐만 아니라, 교통이 정말 매우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시내에 위치한 대사관과 멀더라도 지하철 가까운 곳이면 외곽도 괜찮겠다 싶었다.


3호선 아르밧츠카야 역 (Арбатская)


그 다음, 중개인을 낄지 말지에 관한 문제이다.

러시아에서 월세로 방을 빌릴 때 대부분 첫 달의 월세와 더불어 마지막 달의 월세를 보증금(zalog)의 형태로 지불하게 되는데, 또 동시에 부동산중개인 수수료를 월세의 20%~100% 사이에서 내게 된다. (거의 대부분이 50%이상)

부동산 중개인이 끼지 않으면 수 십 만원이 그냥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대신에 계약서가 멀쩡한 것인지 확인부터 계약서 작성, 방 상태 확인, 집주인의 서류 검토 등을 혼자 해야 하며, 만약 분쟁이 생길 경우 혼자서 대처해야 한다.

반면 부동산 중개인이 있다면 계약서 작성을 대신 해주고,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책임지고 확인한다. 분쟁이 생길 때에도 중개인을 연락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중개인에게 연락해 괜찮은 집을 알아보는 것부터 계약서 작성, 그리고 그 이후에 집 상태 관련해서 모두 맡기고 수수료 3만 루블을 지불했다.

그런데 매물들을 찬찬히 쭉 보면서, 어떤 문구가 계속 눈에 띈다.


"슬라브인만 받음."

"только славян."

"С/П" (славянского просихождения)

매물들의 대부분이 슬라브인만을 받는다 해서 정말 성가셨다. 이건 뭐지? 인종 차별인가? ㅂㄷㅂㄷ? 사실 집주인들이 슬라브인을 선호하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카프카스나 다게스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주로 3D 노동자들)이 혼자 산다고 해놓고 가족들 죄다 데려와 바글바글 살다가 집기 부수고 등등. 그렇기 때문에 저런 문구는 주로 저렴한 (그래도 월세가 백만원..!) 매물들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같은 학생에게 꼭 필요한 그런 저렴한 매물들.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집주인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정말 설득하기가 어렵다. (문자 보낼 때 CAPS LOCK으로 쓰면서 대사관에서 일한다고 했건만.)

그래서 거진 50-60군데 연락을 돌렸는데 고작 2곳에서 집 보러오라고 했고, 그 중 하나는 집주인이 5개월짜리 세 안놓겠다면서 약속을 취소했다.



기간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여기 사람들은 임대 기간을 에어비앤비처럼 ‘일’단위로 할 수도 있고, 2달만 빌릴 수도 있지만, 당연히 압도적 대다수의 집주인들은 1년 이상의 임대를 선호한다. 그래서 잘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집을 구하면서 아 그래도 방을 한 다섯 개만 보고 그 중에 선택하자 했는데 그건 아주 웃기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딱 하나 남은 그 방을 보러 갔는데, 첫 날은 계약은 아니고 방을 구경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스크바는 대도시라, 괜찮은 매물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하루 이틀 만에 계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만약 방을 보고 괜찮았다면 바로 다음날이라도 계약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우물쭈물 하다가 좋은 방 놓치면 어쩔 수 없음)


내가 계약한 쿤쩨보 지역의 신축 아파트


하지만 동시에 그 방이 사기가 아닌지,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판단하는 것도 자기 책임이므로 나같이 자취를 처음 하는(약점 1) 어린 (약점 2) 외국인 (약점 3)에게는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 날 방을 본 후 생각보다 되게 깔끔하고 괜찮았어서 다음날 바로 현금으로 계약했다.

모스크바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관련 사기가 넘쳐나는 곳이기 때문에 계약 시에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 나는 소심해서 혹시라도 사기 당하면 어떡하나 하면서 인터넷을 마구 뒤져봤고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숙지한 채 계약장소로 나갔다.

1) 집주인이 진짜 집주인인지 문서로 확인할 것
2) 집주인이 (집 여러 채를 가진 부자라서) 대리인이 대신 계약당사자로 왔을 경우, 법적 위임장을 반드시 확인해 촬영하여 보관할 것
3) 집주인의 여권(그 자리에 없더라도), 대리인, 중개인의 여권 사본을 받거나 촬영하여 보관할 것
4) 집의 소유주가 여러 명일 경우, 모두의 서명을 받아야 함

5) 계약금을 현금으로 지불할 경우 지불했다는 내용과 함께 서명을 받을 것

6) 수도, 전기, 난방, 가스, 인터넷 등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반드시 확인할 것

7) 공과금이 월세에 포함인지, 별도 지불인지 확인할 것

8) 창문 및 가구 등의 상태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계약 전 미리 언급할 것 등등.


사례) 키르기즈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후배가 살던 집에, 갑자기 자기가 집주인이라며 나타난 여자가 여기서 뭐하냐고 실랑이를 함. 알고보니 이혼 직전의 남편이 소유주인 아내 몰래 먹튀하기 위해 세를 놓은 것이었음.

계약할 때 딸랑 나 혼자 갔었기 때문에 솔직히 진짜 불안했다. 내 손에 들린 수 백만원의 현금... 그리고 처음보는 러시아 아저씨 아줌마들. 내 표정에 의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는지 막 블라블라 하면서 설명하는데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월세 80만원 보증금 80만원 중개수수료 60만원 현금박치기로 다 지불하고 드디어 얻은 모스크바의 보금자리! 첫 자취방!



살림살이 자랑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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