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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영 Jan 13. 2019

5월 10일의 일기

대한민국 외교관

20180510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근무를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면서 걱정했던 ‘루틴화’는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 러시아어도 공부하고, 운동도 하고, 모스크바 구석구석 정복하겠다는 계획은 반복되는 일상에 잊혀진지 오래다.

주말에는 J가 터키에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동안 K와 L이 라트비아에서 돌아왔고, 오랜만에 집에 놀러오기로 해서 저녁먹고 집에서 요리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밤새 놀면서 해뜨는 것도 보고 그랬다.

그런데 안쓰던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오늘(토요일) 저녁 모스크바 세종학당/ 원광학교에서 H 정무공사님 (현 주키르기즈 대사)강연을 갔기 때문이다.

얼마 전 통일관님이 그냥 ‘진영씨 토요일에 공사님 특강있는데 와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라고 해서 무슨 강연인지도 모른 채 일단 주말에 가 보기로 했다. 세종학당에 도착해서 통일관님을 만나고 공사님도 인사드리고 자리에 앉으니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연의 주제는 ‘한러관계에 대한 이해’였다. 보통 한러관계를 역사적으로 들어가보자고 하려면 타임라인을 기준으로 그저 일어난 사실들에 대한 설명 위주가 되기 쉬운데, (내가 강의를 한다면 그렇게 1차원적으로밖에 못 할 것 같다) 공사님의 강연은 예상을 너무나도 쉽게 뛰어넘으셨다.

기본적인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인식 (뉴스 기사, 설문조사 등을 통한)차이를 기반으로 국가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짚었고, 국가의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국제적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아라사-조선, 소련-남북한, 소련-대한민국, 러시아-대한민국 네 가지로 나누어 한러관계를 설명해주셨다.

놀랐던 점은 생각보다 한국과 러시아가 만났던 역사가 짧았다는 것이다. 조선 당시 20년이 안되었고, 나머지 기간들도 그보다 짧거나 비슷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 서로가 너무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H 공사님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던 점은 그러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강연마다 주제가 달랐고, (심지어 한국 드라마도 있었음) 그 열정이 너무나도 잘 전달되었다는 것이었다. 결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러시아인들에게 한국을 소개시켜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만 가지고 이야기하기에는 강연의 질이 너무 좋았다.

이번이 H 공사님 마지막 강연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고 아쉬웠다. 공사님 보면서 배울 점들을 더 찾고싶은데 그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슬펐다. 집으로 가면서 통일관님이 ‘그 강연 녹화한 것좀 받아야겠다’라고 말씀하셔서 그러면 내가 그거 교재만들겠다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대학교 새내기 때는 나름대로 러시아를 전공하게 되면서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에 일조하겠다는 포부(감히?ㅋㅋ)를 가지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정작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노력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켜게 되는 반성의 시간. 지금까지의 게으름, 무관심 전부 반성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다시 가지고 와야겠다.

H 공사님은 2015년부터 원광학교나 다른 기회가 되는 모든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학생들을 만나고 있었고, 정무공사로 계시면서 눈코뜰새없이 바쁘지만 그 와중에도 휴일에 시간을 내어 열정적으로 우리나라를 알리고 그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일조해왔다는 것을 마지막 farewell 동영상을 보고 느꼈다.

나도 우리나라를 러시아인들에게 많이 알리고 싶어했는데 정작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고, 학교 다니고 군대 갔다오고 바쁘게(과연?) 지내다가 잊고있었다. 하지만 그런 핑계댈 것이 아니었다. 관심은 생각이고 생각은 곧 행동이다. 반성하고 열심히 고민해야겠다.

정말 느끼지만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교관 분들은 정말 멋있는 분들이 많다. 배울 점도 많고. 원래 내가 생각했던 가치관도 바뀌는 중이다. 나는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고, 여행도 다니고, 놀고먹고 그러는 것도 좋지만, 내 시간과 열정을 모두 바쳐 이 분들처럼 보람차고 멋있는 삶을 사는 것도 훨씬 멋져보였다.




(덧)

원래는 매일 일기를 쓰고자 했으나, 5월 중순 이후 대통령 국빈방문 행사준비로 인한 격무에 시달려 일기는 저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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