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지역 시장에서 장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날이면 플라스틱 일회용 포장 용기가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린피스가 국내에 있는 대형 마트들의 일회용 포장 용기 실태 조사를 한 결과에서도 어느 한 곳의 업체도 포장 용기 개선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었다는 게 정황에 대한 증거겠죠. 2015년 생산된 플라스틱의 40%가 일회용 포장 용기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단편적인 비교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미 대형 마트에서 비닐봉지 대신 바나나 잎으로 포장을 하거나 옥수수로 만든 생분해 비닐을 공급하려 노력하는 베트남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장을 본다고 해도 마냥 해맑지도 않습니다. 이미 버섯은 스티로폼에, 바나나는 랩과 비닐에 쌓여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양파 하나를 구입하려 할 때마저 상인 분들은 으레 그러하듯 검은색 비닐봉지를 집어 드세요. 그럼에도 시장에는 마트에 없는 중요한 게 있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상품을 살 수 있는 권리 말이죠.
포장되지 않은 상품을 살 수 있는 권리
시장을 가는 저에게는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구입한 물건을 담을 면 주머니 혹은 생분해 비닐, 용기 등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맥북 15인치보다 더 큰 면 주머니 하나를 자주 애용하는데 그 속에 각종 야채를 구분 없이 넣습니다. 구입한 식재료가 집안 부엌까지 도달하는 짧은 여행에 먼지나 파손만 면하면 됩니다. 섞인 야채 구분은 집에 와서 하면 되는 거고 천에 묻은 먼지는 털거나 빨면 그만입니다. 아, 콩나물같이 물기가 있거나 한 단이 묶이지 않은 식재료는 다른 면 주머니에 넣긴 하네요. 해산물이나 육고기는 김장김치를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에 담습니다. 이 역시 집에서 소분하면 그만이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상인분들의 손놀림보다 더 빠르게 '제가 담아갈게요.'라는 한마디를 외칠 준비입니다. 먼저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며 구입의사를 밝히고 ‘여기 담아갈게요.’의 순서로 진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찰나보다 짧은 순간에 집에서 준비해온 면 주머니를 들이밀면서 말하는 게 핵심이죠.
그렇지 않으면 ‘툭’하고 묶음에서 끊어낸 비닐봉지를 든 상인도 나도 당황스럽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하는 작은 스피드 게임이랄까요.
반응도 가지 각색입니다.
‘정말, 여기 담아요? 정말? 진짜죠?’
연거푸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냥 여기다 담아. 색시’
이미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신 상인분들은 이렇게들 말씀하시고 담아주실 때가 많아요. 오늘도 콩나물을 살 때 플라스틱 재질의 보관용기를 꺼낸다고 정신을 쓰는 사이에 벌써 검정 비닐봉지에 포장된 콩나물을 받았어요.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달라고 말씀드려도 구태여 검은 봉지에 담긴 콩나물을 쥐어주시더군요. 원치 않는 봉지는 장을 보러 갈 때마다 한 번씩은 받는 듯합니다.
실제로 시장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온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물건들이 섞이지 않게 하거나 위생을 이유로 검은색 비닐봉지에 개별로 담아 장바구니에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상인의 입장에선 손님이 비닐봉지의 ㅂ도 꺼내지 않아도 ‘아’하면 ‘어’하고 ‘쿵’하면 ‘짝’하듯 빛보다 빠르게 상품을 비닐봉지에 담아야 함을 이해합니다. 그러니 검은 봉지를 권하는 그들의 손짓에는 악의가 없습니다. 선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시장을 방문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즐겁게 면 주머니나 장바구니를 쓰시는 날을 상상해요. 상인 분들도 이런 손님들이 늘어야 검은 봉지 묶음을 뜯는 대신 '어디다 담아줘?'라고 물어보시기 편하시겠죠. 저처럼 느리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마트보다 더 좋은 장소예요. 최소한 융통성이란 게 있는 장소니까요.
‘새댁이 부지런하네.’
결혼한지 5년차에 느림보인 저지만, 사실과는 먼 칭찬을 덤으로 받을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