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안녕하세요?
날씨가 꽤 더워졌죠?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좀 짧은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왔어요. 오빠가 봤으면 기절초풍할 거예요. 제 동생 말대로 전 일반적으로는 모범생처럼 옷을 입어요. 그치만 가끔씩 아주 대담해지거든요.
오늘은 교수님들이 사정이 있다고 그래서 오전 수업이 몽땅 휴강이었어요. 그 덕에 8시까지 늦잠도 자고 아주 좋았어요. 참, 오빤 요즘 아침 몇 시에 일어나요? 이제 병장이니까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되나요?
다음 주에는 2학기 수강 신청이 있고 축제가 이어진다나 봐요. 벌써 2학기를 생각해야 한다니, 얼마 안 있으면 4학년 되고, 그러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겠지요. 아아! 정말 걱정이에요. 오빠도 이젠 제대한 후를 대비해서 준비 많이 해야겠네요. 아이~~ 이런 얘기 재미없어요.
축제 얘기했었지요? 1학년 때는 3일 내내 학교 와서 놀았는데, 2학년 때는 집에서 이틀을 잠만 자다가 마지막 날 친구가 온다구 하고, 수업도 있어서 겸사겸사 잠깐 학교에 왔었지요. 이제 3학년이니 축제를 즐길 나이는 지났잖아요. 그렇다고 들뜬 학교 분위기에서 공부할 수도 없고 해서, 집에서 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교수님들이 진도가 늦다고 수업을 하셔야 한 대요.
얼마 전까지는 우울한 소식들이 너무 많아서 공부도 안 되고 속상하구 그냥 그랬어요. 하지만 난 역시 방관자고 구경꾼에 불과했어요. 마음속 생각과 행동이 연결이 안 되는 것도 무지 속이 상했구요. 하지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을래요. 그냥 내 자리에서 공부하고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자신을 가꾸기로 했어요. 한심한 겁쟁이의 변명입니다.
오빠, 건강 조심하세요. 5월인데도 햇빛은 너무 강하고 기온은 너무 높네요.
1991년 5월 23일
숙이가.
3학년이 된 숙이가 조금은 어른스러운 면모를 살짝살짝 보여주네요. 3학년이니 놀 때가 지났다는 건 무슨 멍멍이 풀 뜯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엄청 어른인 척하고 있죠?
숙이는 아주 아담하고 귀여운? 외모를 뽐내고 다녔답니다. 키가 작아서 하이힐은 기본이었죠. 청바지에 티셔츠를 주로 입었지만 가끔 기분이 꿀꿀할 때는 핫팬츠나 미니 스커트를 입고 등장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었죠. 때론 땅에 끌리는 청바지를 입고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먼지를 말끔히 치우면서 오가기도 했구요.
편지를 쓰던 무렵 학교는 집회와 시위로 혼란했던가 봅니다. 마음으로는 분노하고 함께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외면하는 자신의 모습이 당당하지 못하고 한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네요.
숙이는 4학년이 다가오고 오빠는 국군 병장이니 조금 있으면 둘 다 보호막을 걷고 사회로 나가야겠지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춰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같았을지 짐작이 가네요.
사회에 발을 딛기 얼마 전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