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피에로들의 집>을 읽고
(4년 전에 쓴 글입니다)
허름한 방 한 칸에 구겨지듯 들어가 사는 건 이제 질색이다. 대학을 이유로 상경하면서 1년을 하숙방에서 그렇게 살았다. 번쩍대는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고 상경했으나 나는 이내 깨달았다. 서울에서 산다는 건 화려한 바깥 생활을 위해 초라한 안 생활을 희생하는 교환이라는 것을. 흔히 미디어에 나오는 남자의 자취방처럼 술병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그러한 것을 견디지 못하기에 자주 청소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대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의 점처럼, 단칸방은 아무리 정리하고 청소해도 여전히 계속 궁색했다. 건드릴 수 없는 벽지와 바닥은 둘째치더라도, 도저히 자리를 잡지 못하는 어중간한 물건들이 성가시다. 빨래 건조대라든지, 택배박스라든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있는 걸 보면 이놈의 방구석에는 영원히 구원따위는 없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방에 눌러 붙어 있는 진득한 습기와 퀴퀴한 냄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방을 거쳐 간 사람들이 공기에 아로새겨 놓았던 눅눅함이 조금씩 피부로 파고 들어온다. 그리하여 이불도, 책상도, 의자도, 화장실 변기도 다 눅눅해져서 더는 디딜 곳이 없어질 무렵, 아 못 참겠다,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야겠다, 벽에 달랑달랑 붙어 있는 창문을 홱 열어젖힌다. 그때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건 시원한 풍경이 아니라 옆 건물의 회색 콘크리트 타일이다.
신촌의 하숙집에서 살았지만, ‘신촌하숙’이 그렇게도 부러웠다. <응답하라 1994>에서처럼, 같이 식사하고 안부를 묻고 울고 웃는 보금자리는 신촌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년의 세월이 그렇게 만든 걸까. 픽션과 논픽션의 장르적 차이가 그렇게 만든 걸까. 2014년의 신촌하숙은 온통 비즈니스 관계다. 하숙 이웃들과는 인사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우연히 식사 시간에 마주 치기라도 하면, 무엇이 그렇게 불편한지 이내 접시를 들고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무표정하고 지친 눈빛으로 고개를 스마트폰에 처박고 문 뒤로 사라지는 이웃들과 1년 정도 생활하다보면 이런 불문율을 미덕인가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불문율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유령이다’ 그러건 말건 tv 속에서는 잘생기고 이쁜 20대 청춘들이 동고동락하며 드라마를 써내려간다. 그 즈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고향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진짜 서울 하숙집은 그러냐, 너는 좋겠다, 고아라나 도희같은 애들이 많냐, 심심하진 않겠다, 등등 그러면 나는 그 눅진한 벽에 등을 대고 어이구 이 정신머리 없는 것들아 하고 조용히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나는 그때 혀를 찼지만 누군가는 글을 썼다. 바로 윤대녕 작가가 <피에로들의 집>을 내놓았다. 작중 주인공인 명우는 4년전 ‘난희’가 사라지고, 상실감에 극작가로서도 몰락한다. 도저히 재기할 기회가 없이 바닥을 서성이던 중, 우연히도 ‘마마’라는 늙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그가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들어와 건물 1층의 북카페를 맡아달라고 제안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아몬드나무 하우스’라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다. 그 건물은 상처 입은 자들을 품고 있다. 아버지를 몰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현주, 아혼 후 국어교사 생활을 접고 사진작가로 사는 윤정, 가정폭력으로 거의 맡겨지다시피 한 고등학생 정민, 입대를 앞둔 휴학생 윤태, 그리고 현대사의 회오리를 헤쳐온 마마까지, 명우는 이들 사이로 스며들어간다. 마마의 아들로서, 현주의 상담자로서, 윤태와 정민의 멘토로서, 그리고 윤정의 친구 그 이상으로서 그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다. ‘난희’가 떠난 자리를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어 고통스러운 명우였으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그 자리를 메운다. 다른 인물들도 그렇다. <피에로들의 집>은 천천히 서로의 구멍을 메워가는 이야기다. 따로 극적인 서사 없이, 작위적인 전개 없이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야말로 비즈니스적인 단칸방에 살던 내가 염원했던 것이었다.
상처 입은 인물들의 성장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전형적이다. 그러나 <피에로들의 집>에는 성장소설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낮게 드리워져 있다. 때문에 상처의 극복에만 중점을 둔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이 소설에서는 상처의 원인(진단) 역시도 중요하다. 현주가 생부를 모르고 커야했던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어머니와 이모 사이를 왔다갔다했던 생부의 방종이다. 윤정이 이혼한 까닭은? 남편의 폭력이다. 정민이 부모 곁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역시 아버지의 갑작스런 폭행이다. 마마가 울분을 억누르고 인생의 굴곡을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의 욕심과 방종 때문이다. 그래서 마마는 그토록 육식의 세계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몬드나무 하우스야 말로 ‘아버지’나 ‘남편’이라는 중년의 남성이 가진 육식성에 짓눌려 삶이 파괴된 이들의 난민촌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우에게 아몬드나무 하우스는 필연적인 것일 수 있다. 명우가 난희를 읽게된 까닭을 생각하면 쉽다. 난희가 자주 불려 갔던 술자리에서 그녀를 파괴했던 손길은 모두 중년 남성의 것이었을 테니까.
윤태의 시선은 무심한 듯 날카롭다. 그는 오십대 중반의 남자가 냉면집에서 종업원을 인격적으로 짓밟은 광경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득권이니, 기성세대니 하는 말에서, 끊임없이 약자를 착취하려는 육식성을 읽어낸다.
네, 기성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때로 무차별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걸까요? 더군다나 기득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거칠어지죠. 그런 난폭한 방식으로 자기 보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은데도 말예요. p147
현주, 윤정, 마마, 정민, 그리고 명우까지 모두 난폭한 방식의 희생자들이다. 이런 기득권의 폭력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도 불릴만하다. 불릴만한 것이 아니라 전부 일련의 명칭으로 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가정폭력, 갑질, 연예계 성상납, 이런 사건들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일반적이고 만연해 있는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가족애를 회복하는 따듯하기만 한 소설이 아니다. 따듯하기 전에 슬픈 소설이다. 슬픈 소설은 대개 윤리적이다. 삶의 비극을 그려낸 소설은 필연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지 혹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밝혀내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이 파괴되고 희생자가 도시 어딘가 반지하 단칸방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까닭이 전부 중년 즈음의 기득권들 탓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그렇게 구조화되어있다. 아마 반성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1962년 생 남자로서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회적 재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렇게 빗나간 생각은 아니다. 세월호가 가라앉는 와중에 홀로 도망간 사람도, <내부자들>을 쏙 빼닮은 현실 속의 주역들도 모두 ‘중년 남성’이었으니.
(하나 사족을 덧붙이자면 최근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그 육식성의 세계가 점차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언제부터인가 ‘혐오’라고 불리는 각종 사회 이슈들이 나는 정말 걱정되기 시작했다. ‘상희’의 이야기는 어째 ‘강남역 살인사건’과 겹쳐지지 않는가?)
양면적인 소설이다. 분노와 치유, 사실 이 두 가지가 톱니바퀴 맞물리듯이 정교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에 감도는 허무한 분위기가 안개처럼 분노 위로 덮인다. 여 선생의 윤간과 자살, 세월회의 꿈, 갑질, 연예계 성상납, 가정 폭력 등 사회적 재난들은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른 맥락으로 형상화된다. 이 사건들은 피해자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아몬드나무 하우스에서나 겨우 느슨하게 겹쳐질 뿐이다. 가장 잔혹한 장면들은 모두 직접 전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말로 명우에게 전해진다. 이 흐릿한 형상화가 과연 가장 최선일까. 어떤 면에서 군상극적인 스토리에 여러 사건을 말뚝처럼 때려박은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매끈한 표면 위로 불쑥 튀오나온 말뚝을 마주할 때마다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이 작품은 분명 ‘위로’와 ‘유대’에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따지자면, 난희가 성상납으로 떠났다든지, 윤태가 세월호의 꿈을 꾼다든지 하는 대목이 굳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작가가 그런 비극을 어떻게 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불어가는 짐작 중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하나는, 이야기의 느슨느슨한 짜임이 분명 어느 순간 감정의 신경을 건드리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괜히 뭉클해지는 소설이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 소설을 연재하던 중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래 그때는 참 우울했다. 내 개인적인 페이소스의 한 가운데 세월호라는 비극의 무게 추가 가라앉았던 적이 있었다. 내 4월 16일을 기억한다.
나는 도저히 구제할 길이 없는 방에 뻗어있었다. 이불은 축축했고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날이 포근해지고 공기가 발그레 달아오르는 4월의 날이 하루하루 갈수록 나는 움직이기가 힘들어졌다. 텅 빈 광장에 혼자 서있는 것처럼 문득 주변의 사람이 모조리 사라져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대책이 없다. 나는 실연을 당했고 약에 쓸 때는 없다는 친구놈들은 봄 기운을 따라 각자의 인연을 쫓아다녔다. 그마저 실패한 이들은 군에 입대했다. 가족은 저 멀리 고향에 있었다. 나무에 벚꽃인지 뭔지 하얗고 둥그런 꽃들이 흐드러졌다. 그 향기와 가루를 머금어 아득해진 봄바람이 내 피부를 조심히 적시는 밤이었다. 갖가지 꽃이 피어나는 교정에서 나는 순식간에 미아가 되었다. 모두 가족과, 혹은 연인과 함께 하고 있을 그런 밤에, 달은 아주 크고 둥글었다. 멀리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나와 지금 손을 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친구의 얼굴이 달에 그려졌다. 그 순간 나는 밤 바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그 달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주 잘게 찢어 발겨 바람에 벚꽃잎이 떨어지듯이 달의 파편들을 휘날리고 싶었다. 흐드러지는 달의 노란 먼지들 속에 내 외로움과 실연과 후회와 무기력이 섞어 보내고 싶었다. 그 초현실적인 장관의 가운데서 나를 향해 걸어올 저벅대는 발소리를 아주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
그래 그때가지는 그나마 감상적인 여유가 있었다. 며칠 안에 세월호 사건을 보도로 접했다. 곧 내 푸른 우울은 검고 진하게 짙어졌다. 세상에 극적인 누군가 따위는 없구나. 초현실적인 장면이 현실이 된다면 오로지 비극 속에서만 그렇구나. 언론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조차도 매일매일 바꿔가면서 던져댔다. 진실을 알 수 없었으나, 구정내나는 현실은 알 수 있었다. 떠들어대는 정치가와 언론, 수근대는 사람들이 진창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소용돌이 안쪽의 공동에는 가라앉는 배와 그 안에 갇혀 수장된 영혼들과 손톱자국이 있을 터, 나와 그 공동사이의 거리만큼 충격과 슬픔은 희석되었으나, 공동에서 뿜어져나온 슬픔의 재들은 공기 중으로 조용히 스며들어갔다. 들숨과 날숨으로 내 몸 속을 지나다닐 때마다 굴뚝처럼 앙금의 잿더미가 시나브로 쌓였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잿더미는 어느새 무거운 추가 되어 우울의 연못 속으로 깊게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안팎의 비극 와중에 나는 타인을 소망했다. 소중한 가족은 모두 고향에 있으니, 나는 어느 순간 도시의 난민이었던 것일까. 주말 저녁에는 어김없이 여럿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싶었고, 슬픔과 고민을 이야기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시간을 원했다. 서울에 가족이 있는 친구들이 정말로 부러웠다. 내가 난민의 처지로 떨어지는 순간은 가끔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벗겨지지 않는 생의 굴레처럼 영원히 덧씌워져 있으리라. 내게 <피에로들의 집>은 그들을 위한 염원을 담은 불상과 탑과 같은 책이다. 이들 진정한 도시의 난민들에게, 지금 좁고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가족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서로의 사진첩을 보면서 헤실헤실거리거나, 어디 먼 곳에서 괜히 아련해질 수 있는 그런 가족이 생기기를, 제발 그들이 무자비한 삶의 비극에 대항하는 일말의 보상이나마 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서로를 꾸준히 구원해 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