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와 현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죠.”
입에 붙은 말이지만 출처는 가물가물하다. mp3 사용만 허용되던 군복무 시절 ‘이동진의 빨간 책방’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잔뜩 기기에 담아서 듣고 다녔는데 그 중 자연과학책(아마도 ‘총, 균, 쇠’)을 다룬 편에서 나온 말이라고 짐작해볼 뿐이다. 멋드러진 문장이다. 세상의 진리를 포괄하고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술자리에서나, 남을 훈계할 때나, 아는 척할 때나 내가 뭐라도 되는 양 으스대고 싶을 때 애용했다. 대개 그런 표현은 따지고 보면 아무 의미 없거나 뜻만 고상하고 현실에서는 무용한 경우가 많다. 죽은 말과 달리 이 문장은 현대 사회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뜻도 모르는 이 문장을 남발하며 으스대는 내 말을 듣는 친구들이 무릎을 탁 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풀어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것’(현상)을 ‘당연히 그렇게 모두가 따르고 지켜야 하는 것’(당위)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현상은 자연과 과학의 영역이고 당위는 사회와 도덕의 영역이다. 둘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인 만큼 신비로운 자연의 질서는 마치 인간들끼리의 일과 사건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인간은 본래 일상 뒤편에 숨은 채 흘러가는 ‘질서’를 파악하면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던 거대한 자연과 세상의 존재감을 문득 깨닫는다. 그럴 때 경외심에 빠지고, 세상의 진리를 알았다는 고양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군집을 이룬 개미가 사탕을 열심히 옮겨 가는 걸 보고는 개미처럼 인간도 사회적 동물이라고 선언하는 이론가가 나타나는 것이고, 움직일 수 없는 나무끼리도 햇빛과 양분을 더 확보하기 위한 자리싸움에 나선다는 사실에 인간의 생도 경쟁으로 점철됐을 뿐이라는 섣부른 결론에 실망하는 비관론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적자생존의 원리는 찰스 다윈 선생님이 자연을 꿰뚫어 본 후 내놓은 정확한 진리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좇을 고상한 목표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이 어떤지와 별개로 추구해야 하는 다른 멋진 목적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강조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원리 역시 사실은 적자생존이 유발하는 참사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손 대대로 부와 군사를 물려주며 특정 군벌이나 집단에게 권력이 쌓이는 일이 사회적 정의의 차원에서 정당화됐으면 인간사는 끝없는 예속과 착취 생활이나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혁명의 물결로 점철됐을 것이다. 최소한 현대 사회에서 고대, 중세와 같은 예속이나 대규모 봉기가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종이 자연의 원리(현상)와 다르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인간만의 원칙을 수립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이웃을 괴롭히지 말고,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이런 차원에서 결실을 맺은 인류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스포츠계에서 이런 ‘현상과 당위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이슈가 등장했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선수들을 여성부 대회에 출전시켜도 되는지 문제다. 최근 각 종목을 관장하는 국제 스포츠 연맹 가운데 일부가 이런 성전환 선수들의 여성부 대회 참가를 제한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지난달 19일 국제수영연맹(FINA)이 12세 이전에 성(性)을 바꾼 경우에만 여성부 출전을 허용하는 새 정책을 채택한 게 시작이었다. 12세 이전에 성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사실상 성전환 선수 출전을 막은 것이다. 럭비 종목을 양분하는 13인제 럭비 대표 단체인 국제럭비리그(IRL)도 이틀 뒤 당분간 성전환 선수의 여성부 출전을 금지하기로 했다. 단체 차원의 공식 성명을 내진 않았지만, 세계육상연맹 회장도 영국 BBC방송과 최근 인터뷰에서 FINA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은 작년 11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성전환 선수 대회 출전에 대한 새 권고안을 낸 데서 비롯됐다. IOC는 각 종목별 단체가 성전환 선수의 구체적 출전자격을 자율로 판단하라고 했다. 그런 만큼 FINA 등 외 다른 국제 스포츠 연맹들도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한 자체 판단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안다. 그렇기에 1, 2, 3위 등 훌륭한 기량을 뽐낸 선수에게 영광과 명예를 보상으로 주는 스포츠라는 분야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종목을 나누기로 했다. 태생적으로 육체를 겨누는 운동 종목에 더 유리한 남성과 경쟁하라는 건 여성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성별과 관계없는 ‘인간 대 인간’의 무한 경쟁을 피하고 ‘성별별 경쟁’이라는 방식이 인간 종의 새로운 당위이자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성전환 선수는 둘 중 어디에 넣어야 할까? 과학 기술과 의학이 발달해서 인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기존 현상에 대한 판단을 수정했다. 성이 남성과 여성만 있다는 인식에서 그 사이에 여러 ‘간성’들이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간 것이다. 더욱이 자기 의사, 정체성대로 생물학적 성을 바꾸는 성전환자들이 나타나고 또 사회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자기 뜻에 따라 자기 인생을 살겠다며 남성에서 여성이 된 ‘운동선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에서 만들어낸 우리의 당위와 제도에게도 이들의 등장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역도 선수 로렐 허버드와 수영 선수 리아 토머스의 등장으로 스포츠계는 혼란스러워졌다. 남성일 당시 130kg의 거구였던 허버드는 2013년 성을 바꿨다. 2015년부터 여러 차례 남성 호르몬 수치 검사를 했던 허버드는 2016년 12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IOC와 국제역도연맹(IWF)가 제시한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서 여성부 출전을 허락받았다. 2017년부터는 뉴질랜드 국가대표로 뛴 그는 세계역도선수권대회 여자 최중량급 경기에서 인상 124㎏, 용상 151㎏을 들어 합계(275㎏) 2위에 올랐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 2019년부터 남성호르몬을 줄이고 여성호르몬을 채우는 요법을 시작한 리아 토마스는 남성일 때는 수영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21년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주관 수영대회에 여성부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올해 3월 500야드 자유형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NCAA에서 우승한 성전환 여성 선수가 됐다. 토머스가 시상대가 올라서자 야유가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사기꾼’이라고 쏘아붙였고, 수영장 밖에 모인 군중은 “공정한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이들이 외친 ‘공정한 스포츠’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변주된다. 스포츠에서 공정성은 무얼 뜻하는가. 내 취재는 여기서 시작했다. 난 이게 궁금했다. 성전환 선수의 여성부 출전 논란을 다룬 국내 연구 자료는 당연하게도 거의 없었다.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과 구글 스칼라를 통해 확인한 자료는 단 두 건이었다. 그마저도 한 건은 성전환 선수 출전 여부에 대한 미국 법원의 판결을 해설해놓은 것이었는데, 판결문을 번역한 수준에 그쳐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다행히 나머지 자료가 이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었다. 국민대학교에서 스포츠 윤리학을 연구하는 박성주 체육대학 교수가 쓴 논문으로 제목부터가 ‘트랜스젠더의 스포츠 접근권에 관한 윤리적 고찰’이었다. 박성주 교수 역시 성전환 선수를 통해 스포츠에서 ‘공정성’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야유를 쏟아낸 관중과 달리 토머스를 ‘공정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그에게 성전환 선수 출전 문제는 스포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문제의식을 따라가보니 스포츠 공정성에 대한 질문은 다시 모습을 바꿨다. 스포츠에서 왜 공정성이 지켜져야 하는가. 이는 결국 ‘대체 스포츠의 본질이 뭐냐’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또 한 번 변했다.
스포츠에서 공정성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스포츠가 경쟁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곧 다른 사람과 승부해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이 경쟁의 승자에게 ‘영광’을 주기로 했다. 스포츠가 결국 영광을 좇는 경주라면, 스포츠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부와 명예로 바뀐다. 부, 명예, 권력, 영광. 모두가 이런 사회적 자원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선수들은 오늘도 땀을 흘리며 기술과 기량을 갈고 닦는다. 마구잡이 진흙탕 개싸움이 되지 않도록 규칙도 생긴다. 이를 어기면 반칙을 범했다며 퇴장당하거나 실격돼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래서 육상 황제 우사인 볼트도,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도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져야만 출발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출발선에서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다. 그런데 박성주 교수는 들여다보면 이런 출발선이 사실상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식년을 받아 해외 체류이라 유선 연락이 어려웠던 박성주 교수에게 이메일을 통해 성전환 선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그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했다.
“모든 선수가 똑같은 출발선에 설 수 없다는 게 스포츠의 본질입니다.”
“뜯어보면 스포츠에서 완전한 공정은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만 집착하면 인간으로서 필요한 다른 가치를 희생하게 됩니다.” 박 교수는 각자 종목에 타고난 신체를 물려받은 볼트와 펠프스의 출발선이 사실은 다른 선수와 다르다고 지적한다. 펠프스는 손목, 발목, 팔꿈치에 이중 관절을 지니고 있다. 194cm 신장에 유난히 상체와 팔이 길다. 애초에 스포츠에서는 선수들이 전적으로 동일한 조건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 노력만으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스포츠에서 공정성의 핵심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지 여부인데 이미 이런 이득은 너무도 많아요. 고지대에 사는 장거리 종목 선수는 저지대 사람보다, 부국 선수는 빈국 선수보다 시작도 전에 유리한 조건에서 경쟁을 펼치죠.” 박 교수는 “유독 성전환 선수에 대해서만 이런 공정성의 잣대를 가혹하게 적용하는 건 일관성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곧 유전적인 이득에 따른 불평등을 용인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따라 성을 바꾼 사람들을 배척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다.
리아 토머스처럼 공식 무대에서 활약하는 성전환 선수가 등장한 영미권에서는 공론장에서 이 문제를 계속 토론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를 포함해 여러 언론이 이 문제를 취재해서 여러 차례 긴 기사를 냈다. 성별 발달 연구자로 NCAA 자문역이었던 에릭 빌라인 조지워싱턴대학 유전체학과 교수는 2020년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뉴욕타임스에 박 교수와 비슷한 설명을 내놨다. 빌라인 교수는 “성전환 선수가 일부 우위를 지닌다고 해도 그게 항상 불공정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모든 정상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보다 그런 우위를 가집니다.” 빌라인 교수는 우사인 볼트의 예를 들며 “이는 곧 볼트가 매번 이기니까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최소한 내가 본 이런 기사들은 이런 애매모호한 결론을 독자에 던져줬다. 성전환 선수의 여성부 출전에 대해서는 모두를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포용의 논리’와 모두가 최대한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공정의 논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속 시원한 결론을 기대하고 끝까지 기사를 읽었던 사람에게는 하나마나한 대답이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 공영방송 BBC도 다르지 않았다. BBC는 올해 5월 아예 팟캐스트에서 찬성, 반대 측 과학자를 섭외해서 서로의 논리를 병행해서 토론시키는 구성을 짜버렸다.
이 뉴욕타임스 기사, BBC 팟캐스트, 가디언 기사를 읽는 중 이들 언론, 심지어 국내 언론에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취재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조애나 하퍼다. 성전환 선수의 운동 경기 출전을 따져보는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한 스포츠 생리학자다. 놀라운 사실은 그 스스로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하퍼의 연구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했다. 아마추어 육상 선수 출신인 하퍼는 성 정체성을 따라 여성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후 호르몬 대체 요법을 실시했다. 1년 만에 장거리 달리기 기록이 상당히 떨어졌다. 하퍼는 여성으로 전환한 장거리 선수 8명을 고생 끝에 수소문해 다른 사람들도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확인했다. 그는 이 8명 모두 경주 속도가 기존보다 10%이상 떨어져 여성부에서 경쟁이 가능한 수준으로 내려왔다고 결론을 냈고, 이를 2015년 학술지에 발표했다. 여기서 결론만큼이나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바로 표본을 모으는 과정이다. 8명이면 아주 적은 표본이다. 일반적 경우라면 연구가 성립되기도 힘든 수준이다. 그러나 8이라는 숫자는 하퍼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그가 이 8명을 모으는 데 7년이 걸렸다.
하퍼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역설적이다. 8명을 확인하는 데 7년이 걸린 이유는 성전환 선수가 우리 사회의 소수자라는 데 있다. 이들은 성 정체성을 감춘다. 그냥 성전환자도 확인하기 어려울뿐더러, 인터뷰나 연구를 요청하면 응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들 중 운동선수는 극소수다. 여기서 ‘과학적 증거의 부족’이라는 장애물이 하나 생겨난다. 하퍼는 올해 초 낸 논문에서 스스로 관련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시인했다. 현재 전문 운동선수 수준의 표본으로 장기적 경과를 확인한 연구는 두 개뿐이다. 하나가 바로 ‘하퍼의 8명’이고, 또 하나가 2020년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연구진이 수행한 연구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는 하퍼의 결론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들이 성을 여성으로 바꾼 군인들의 운동능력을 분석해보니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에서는 다른 여성 비교군과 차이가 없었지만, 1.5km 달리기는 훨씬 잘 뛰었다. 운동능력 차이가 어느 정도 확인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게 현실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세 번째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이게 공정한 스포츠냐”라고 외치는 군중을 보고 움츠러드는 사람들을 찾는 어렵고 지난한 작업이 된다.
이런 과학적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박성주 교수가 보여준 스포츠 ‘윤리’를 넘어서는 일이었고, 성전환 선수의 운동능력에 대한 진정한 현상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일이었다. 나는 하퍼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러나 답이 너무 늦게 왔고, 서면 인터뷰보다는 통화를 원했다. 그러나 내게 이런 어려운 주제로 능숙해도 회화를 펼칠 능력이 없어 순조롭게 작업이 이뤄질 것 같지 않았다. 기사를 최대한 빨리 내려고 다른 취재원을 찾던 중 최근 성전환 선수에 대한 논문을 낸 또 다른 연구자에게 이 문제에 대한 서면 답변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고마운 취재원은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과대학의 토미 룬드버그 연구원이었다. 그는 “그럼요 내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군요”라고 흔쾌히 인터뷰를 허락해줬다. 운동생리학 분야 전문가인 그는 2020년 남성호르몬 억제 요법이 성전환자의 근육량, 골밀도, 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는 하퍼처럼 실제 성전환 운동선수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지금까지 나온 모든 성전환자의 운동능력에 대한 문헌들을 평가하고 따져보는 ‘문헌연구’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는 2020년 7, 10, 15인제 럭비 대표기구인 월드럭비(WR)가 세계 최초로 여자부 국제 대회에 성전환 선수 출전을 전면 금지하는 데 영향을 줬다.
룬드버그 연구원 역시 이런 ‘운동선수’ 대상 연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박성주 교수의 ‘출발선 윤리학’, 하퍼의 ‘8명의 과학’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논거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사춘기 발달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남성과 여성은 사춘기부터 근육량, 골밀도를 비롯해 심장, 폐에서 헤모글로빈 수치가 변하기 시작한다. 룬드버그 연구원은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 성전환 선수를 둘러싼 ‘공정성 논쟁’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스포츠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라고 합니다. 모두가 스포츠를 누릴 수 있어야겠죠. 그러나 동시에 공정성과 선수의 안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남자가 여성보다 (신체를 쓰는) 운동선수로서 여러 이점을 갖는다는 게 명백하고 이 이점을 없앨 수도 없습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대원칙을 어기지 않고서 여성이 된 성전환자들을 여성부 대회에 출전시킬 수 있는 방법도 지금은 없습니다. 여성이 된 성전환 선수들은 (여성부 대회가 아니라) 남성부 대회나 (모든 성별이 참여하는) 오픈부에는 참여할 수 있겠죠.”
- 성전환 선수의 여성부 출전을 사실상 막은 국제수영연맹(FINA)나 국제럭비리그(IRL)의 최근 처사가 적절하다고 보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런 결정은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습니다. 이런 제한이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성들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말이죠.”
- 현재 이 문제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경험적 연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호르몬 억제 요법을 시행한 ‘일반인’ 대상 연구는 많이 있습니다. 이 요법을 시행한 기간과 관계없이 남성으로 태어난 덕에 지니게 된 신체적 이점, 특히 근육량과 힘이 (여성 수준까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성전환 운동선수에게 이런 요법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 연구가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몇몇 실제 선수의 사례가 지난해에 두드러지면서 논쟁이 커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근력운동을 하면 (성전환 선수가) 호르몬 억제 요법을 시작한다고 해도 근육량 손실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동선수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면 훨씬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그렇다고 해서 호르몬 억제로 남성으로 태어난 이점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판단하자는 건 아직 튼튼한 근거가 없는 논리입니다.”
- 우사인 볼트, 마이클 펠프스 같은 사람들은 타고나기를 신체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합니다. 이런 모든 신체적 이점과 성전환 선수의 이점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이게 바로 흔히 하는 오해입니다. 어떤 타고난 이점은 스포츠에서 축하받아 마땅한 것들이 있습니다. 반면 지탄받아야 할 ‘이점’도 있죠. 남성으로 태어났기에 얻은 이점은 후자입니다. 여성이 절대 접근할 수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볼트와 펠프스 같은 사람들은 남성이나 여성 같이 ‘같은 성별’ 내에서 특출난 선수로 추앙받습니다. 이와 달리 단순히 ‘남성 출신’이라는 게 여성이라는 것보다 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펠프스처럼) 수영에 유리한 큰 발을 가지거나 (볼트처럼) 질주하는 데 유리한 근육 조직을 가질 수 있겠죠. 그러나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사춘기 발달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여성에게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려면 스포츠에서는 오히려 여성을 보호해야 하는 셈입니다. 이는 연령별로 경쟁을 다르게 하는 정책과 취지가 같습니다. 16살이라는 게 12살이라는 것보다 더 이득을 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같은 연령끼리 경쟁하게 해야죠. 일부 12살짜리가 16살짜리보다 운동을 더 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령별 구분이 공정에 더 가깝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른바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줬다. 세상을 인간 세계와 사후세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눴던 그리스도교의 ‘과학’이 지배적인 시대에서는 천국에 올라갈 수 있도록 죄를 짓지 않고 회개하는 것이 따라야 할 덕목이 됐다. 그런데 무엇이 정확한 지식인지 알 수 없을 때는 어떤 규범을 모셔야 하는지 알기가 어려워진다. 이 경우도 그렇다. 내가 내린 결론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운동선수’가 정말 다른 여성보다 우월한 운동능력을 보이는지 ‘물증’은 없고 ‘정황증거’만 있다는 것이다. 이 정황증거가 정말 사실로 드러난다면? 성전환 선수들은 다른여성 선수들의 기회를 빼앗는 불공정한 짓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아 토머스에게 ‘이게 공정한 스포츠냐’ 외치는 군중들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정황증거가 추후 연구에서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성전환 선수의 출전을 금지하는 국제 스포츠 기구들이 지금 비윤리적인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학(현상)의 영역에서 아무것도 규명되지 못한 지금, 무슨 윤리와 가치(당위)를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정성? 포용성? 당위와 현상이 진득하게 엉겨붙어 안을 들여다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혼란의 덩어리가 떨어진 것이다. 그 앞에서는 적자생존, 시장에서 수요-공급의 균형과 같은 가지런한 현상이 보이지 않고, 무엇을 좇으면 좋을지 뚜렷한 당위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남성에서 여성이 된 후에도 운동 경기에서 경쟁하고 싶다며 손을 드는 사람들이 2022년 지구에 하나 둘 씩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등장에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여성 선수들도 손을 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점점 이런 불평과 항의가 커질테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과연 성전환 운동선수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난제로 남아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나는 국제적으로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국에도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해 운동 경기에 뛰는 선수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엘리트 수준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정확히 말해 '한 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2007년 신은경씨가 언론보도로 알려지긴 했다. 당시 국내 최초 야자 야구선수였던 안향미씨가 감독을 맡았던 야구팀 선라이즈에서 뛴 선수였다. 2006년 성전환 수술을 받고 법적으로 여성이 된 신은경씨는 당시 투수를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은 엘리트 선수가 아니고, 여성 선수의 권리 침해와도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이 분이 이렇게 여성팀에 참여해 투수를 맡았다는 사실은 스포츠가 갖고 있는 포용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어떤 영광도, 상금도, 사회적 인정도 걸려있지 않다면 스포츠는 함께 땀흘리는 '재미있는 놀이'로 되돌아간다. 공정성을 따져볼 사례도, 관련해 의견을 물어볼 만한 취재원도 아니다.
무엇보다 내 취재 활동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특히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시선도 함께 따라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자신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 분들. 자신의 성을 받아주는 가족, 친지들과 안정적 일상을 어렵게 꾸려낸 사람들에게는 공정성이니 포용성이니, 다 웃기는 얘기일 수 있겠다.
당위와 현상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며 불특정 다수에게 일침을 놓던 나는 여기까지와 와서 이 문제에 대한 당위도, 현상도 무엇인지 말할 수 없게 돼 버렸다. 다만 나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줬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도 언젠가 리아 토마스 같은 선수가 등장해 '넌 공정하지 않아' 따위의 비난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 때 그 혐오 섞인 목소리가 과연 정당한지 아닌지 첨예한 갈등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성전환 운동선수의 데이터가 쌓여있을까? 이 데이터는 갈등을 정리하고, 그 속에서 무엇이 당위인지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하는지 기준이 된다. 그게 없다면 우리는 끝없이 당위와 현상을 자신의 신념에 맞춰 멋대로 해석하며 세상에 악다구니를 질러대는 여러 사람들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 차별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스포츠는 놀이가 아닌 경쟁, 그 본질은 포용성이 아닌 공정성으로 고정될 터. 이 차별이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 차별'로 인정받으려면 성전환 선수의 외양과 이질감이 이 아니라 룬드버그 연구원이 주장한 '지울 수 없는 남성의 우위'가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70703790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