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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05.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2-귀접(E)>



 나는 은석이의 부인을 만났다. 회사 근처로 와 달라는 말에 다급히 도심을 가로질러 회사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초조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낯선 여자가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 사람이구나.

 사람이 예쁜지 멋진지 모르겠다. 내 눈에는 그저 겁에 질린 가여운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인 눈앞의 상황에 주저앉은 가련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김은석...”


 “예, 맞습니다. 소사님이시죠? 은석 씨 부인 이하나입니다.”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잡으며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미리 주문해 두었다며 내 몫의 커피를 내미는 그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꿀떡꿀떡 삼켰다. 얼마나 갈증이 났는지 모른다. 운전을 해 오는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타고 속이 말랐는지 모른다. 커피를 반 정도 마셔버리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그녀는 여전히 애가 타는 얼굴이었다.


 “거두절미하고, 이것부터 받으세요.”


 나는 소중하게 가지고 온 호리병 모양의 약병을 내밀었다. 하나 씨는 덜덜 떠는 손으로 약병을 꼭 쥐었다.


 “녀석이 원하는 약은 이게 아닙니다. 충격이 크실 걸 알지만, 사실대로 말씀을 드려야 하나 씨가 이겨내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은석이 그놈, 하나 씨에게는 정말 진심입니다. 정말 하나 씨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혼하고 말고는 하나 씨가 결정할 일이니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은석이 진심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녀석은 지금 몽마에 홀려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진행이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정말 나쁜 놈이 될 수도 있어요. 녀석은... 몽마와 살길 원해요. 영원히 깨지 않는 잠을 자길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했다. 뭔가 일이 있긴 있었구나.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알 것 같으니까요. 많이 진행된 모양인데, 이 약을 한 번 먹는다고 해서 완벽하게 나아질지, 어떨지는 모릅니다. 약사님이 직접 진맥을 한 게 아니니까요. 일단 한 번 먹여보세요. 식전에 먹어야 합니다. 식전에 반드시 다 마시도록 해야 합니다. 몽마에 홀린 채 계속 살아가면... 정말 나쁜 놈이 될 겁니다. 하나 씨 몸은 하나 씨가 챙기셔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녀는 호리병을 힘주어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이 세다. 충격으로 울거나 혼절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꽤 강단도 있고 용감했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리고 업무용으로 쓰려고 했던 원래의 전화기를 꺼냈다. 은석이 놈은 집에서 자고 있을 거란다. 요즘은 수면제를 달고 산다고 했다. 미친놈.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나는 은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통, 두 통, 세 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녀석에게 코톡을 남겼다.


 -마. 니가 이겼다. 네가 얼마나 지랄을 떨었으면 제수씨가 전화 왔더라. 울면서 너 좀 살려 달라 하더라. 제수씨한테는 너 낫는 약이라고 말했다. 약값 졸라 비싸다. 한 번 먹어서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이상하다고 제수씨한테 지랄하지 말고 내한테 연락해라. 약사님도 한 번 먹어서는 안 될 거라고 하더라. 일단 먹어. 제수씨가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처먹어, 새끼야. 너는 시발 진짜... 진짜 개새끼다. 내가 제수씨 죽을 까 봐 주는 거다. 새끼야. 이 새끼, 너 이제 자기 전에 내 있는 쪽으로 삼배하고 처자라. 알겠냐.


 나는 코톡 내용을 하나 씨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은석이는 제 친굽니다. 저한테도 정말 소중한 놈입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제게는 소중한 친굽니다. 그런 친구가 잘 못 되게 둘 수는 없죠. 이 약은, 진짜로 낫게 하는 약이 맞습니다. 제수씨는 거짓말할 필요 없습니다. 거짓말은 저만 하면 되니까요. 이건 낫는 약이, 정말 맞습니다. 약사님을 믿으세요. 아니, 절 믿으세요.”


 그녀는 한참을 화면의 노란 말풍선을 바라보다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하나 씨는 떨리는 손으로 하얀 약병을 만지작거리다, 손수건을 꺼내 약병을 꼼꼼하게 싸 가방에 넣었다.


 “조금 전에 전화드렸던 그 번호, 그 번호가 제 연락처입니다. 일전에 전화하신 번호는 업무용이고요. 제 개인번호로 문자 주시면, 제가 따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 약값은...”


 아. 약값 비싸다고 했던 그 내용 때문인가. 갑자기 약을 준다고 나오라 했으니 준비도 못 했을 거고, 나 역시 약값은 물어보지도 않고 나왔는데.


 “아, 그게... 저도 약 받자마자 뛰쳐나온 거라서요. 약값은 약사님께 여쭤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마가 됐든, 너무 심하게 비싸면 내가 좀 보태면 된다. 얼마 안 한다고 하면 내가 그냥 내도 되고. 사실 약값은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 놈을 살리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하나 씨는 그래도... 하며 가방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언제 돈까지 준비 한 거지?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 제게 호은당을 소개 해 주신 사모님께 조언을 구해서 급하게 조금 챙겼습니다. 제가 지금은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요. 회사가 잘 돼도 그건 회사 돈이니까... 모자란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할 테니, 일단 이것만이라도 받아주세요.”


 음. 그럼 받지, 뭐. 모자란 부분은 내가 내면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봉투를 받아 들었다.


 “예, 그럼 금액에 대해서 약사님과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 씨는 이제야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 죽을 사람처럼 시커멓던 사람이 이제야 혈색이 돌았다. 바들바들 떨던 손도 차분해졌고 입 꼬리도 미세하지만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은석이는 강한 놈입니다. 그놈, 아주 센 놈이에요. 술 처먹고도 양아치 세 명을 혼자 패서 경찰에 넘긴 놈입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그 이야기가 진짜였네요. 늘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감사합니다, 소사님.”


 하나 씨는 픽 웃었다. 나는 복용법을 다시 한번 일러주고 일어섰다.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와, 은미 씨 굶겼다. 난 이제 죽었네. 들어가면 내 목을 뜯어버리지 않을까. 빨리 가서 뭐라도 먹여야지.

 하나 씨를 커피숍에 남겨두고 나는 후다닥 나와 차에 올랐다. 하얀색 SUV는 원래 은미 씨가 내게 보너스 개념으로 선물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첫 시승이었던 약초를 캐러 다녀온 이후, 나는 이 차를 받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결국 차는 그냥 호은당의 업무용 자동차가 되고 말았지만, 어느샌가 내 개인 차량처럼 쓰이고 있다. 이 차를 볼 때마다 여전히 시뻘건 손자국과 펄럭거리던 허연 무언가가 기억나서 소름이 돋지만, 오늘은 손자국 따위 생각하지 않고 달렸던 것 같다. 호은당으로 돌아가는 길, 목덜미가 으스스했다. 은미 씨를 굶겨서일까, 손자국이 떠올라서 일까. 뭐가 됐든, 오늘 호은당에서 안 잘리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호은당에 도착했다. 나는 덜덜 떠는 손으로 대문을 밀었다. 호은당은 조용했다. 어라, 우민이는 어디 갔지? 나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잉? 주방에는 무언가 만들어 먹은 흔적이 아주 요란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언뜻 안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안채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어, 형! 오셨어요? 점심 안 드셨죠? 제가 금방 차려드릴게요!”


 뭐야, 불고기 덮밥? 은미 씨는 아주 맛있게 덮밥을 먹고 있었다. 내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자 은미 씨는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앉아요, 앉아. 우민이, 요리 솜씨가 대단해요! 예전에도 종종 요리했다더니, 제법 잘하는 거 있죠? 진짜 맛있어요!”


 에엥? 정말? 우민이가 점심을 만들었다고? 불고기 덮밥을?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민이가 먹다 만 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삐뚤삐뚤 서툴지만 적당히 자른 불고기와 당근, 버섯, 부추, 양파가 잘 어우러져 있었다. 달달하고 짭짤한 냄새도 좋았다. 오호라. 이 녀석, 제법인데? 이내 우민이가 내 몫의 밥을 들고 왔다. 놋그릇에 담은 모양새도 예뻤다. 이 자식, 물건이었구만! 나는 불고기를 썩썩 비벼 얼른 입에 넣었다.


 “야! 간을...!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모양새는 백점 만점에 백만 점이요, 냄새 또한 백점 만점에 오백 점인데... 짜다. 짜도 짜도 이렇게 짤 수가 없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숟가락을 놓자 은미 씨가 깔깔 웃었다. 우민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튜브 보고 따라 했는데... 왜 이렇게 짜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약사님이랑 저랑 한 숟가락 먹고 한숨 쉬고 있는데 형이 와서... 약사님이 형 놀려주자고... 그래서 그랬어요.”


 아. 그래. 나 놀리겠다고 이 소태 불고기 덮밥을 먹였다? 대단들 하십니다. 밥 굶겼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뭐, 안 잘렸으니 됐다 치자. 나는 그릇을 들고일어났다.


 “먹지 마! 둘 다 먹지 마요. 염장되겠네. 기다려 봐요. 금방 다시 해 줄 테니까.”


 우민이와 은미 씨까지 쪼르르 밥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따라왔다. 나는 남은 불고기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많은걸 다 했네, 다 했어. 사흘 내내 불고기 덮밥 먹겠네.

 나는 양파와 버섯을 잔뜩 썰어 넣고, 우민이를 텃밭으로 보냈다. 우민이는 깻잎과 상추를 잔뜩 뜯어 깨끗이 씻어 왔고, 은미 씨는 멀찍이 서서 숟가락만 물고 있었다. 침 흐르겠어요.

 야채를 잔뜩 집어넣고 물과 설탕을 더 넣었다. 어떻게 해도 이 짠맛을 잡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까 보다는 낫겠지. 밥도... 아이고야. 많이도 했다. 세 사람 먹는데 밥을 10인분 밥솥 한가득 한 모양이다. 그래. 늬들 둘이 6인분 먹는 건 아는데, 내가 혼자 4인분 먹지는 않잖아.


 새로 밥을 떠 담고, 새로 간을 맞춘 불고기를 위에 올렸다. 깻잎을 잘게 썰어 위에 올리고, 상추는 쌈 싸 먹으라며 따로 담아 주었다. 마당 테이블에 오랜만에 밥상이 차려졌다. 색깔이나 모양새는 우민이가 만든 것이 훨씬 좋았다. 내가 만든 건 고기보다 채소가 훨씬 많았다. 은미 씨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짜게 먹으면 해로운 거 알잖아요. 먹어 봐요. 아까 보다는 나을 거니까. 우민이 너는... 밥 하지 마. 그냥 형아가 밥 해 줄게. 다시는 밥시간에 안 나갈게.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다행히도 아까 보다는 덜 짜다. 상추에 싸서 먹으니 훨씬 나았다. 은미 씨도 고기가 적다며 투덜거리던 입이 쏙 들어갔다. 우민이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고 또 밥을 담고 있었다. 내가 비울 때를 대비해서 반찬을 넉넉하게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그냥 시켜먹어.”


 우민이와 은미 씨는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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